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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배경
서울의 동쪽 한강변은 백제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비옥한 토질과 강과 산이 있어 방어와 교통의 편리함이 있어 고대부터 부족 또는 집단의 정착지로 알맞는 곳이었다.
서울 일대는 삼국시대에는 서로 접경을 이루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곳이기도 해서 일찍이 역사의 현장으로 부각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양주목(楊州牧)에 소속되어 남경(南京)이라 해서 개경(開京) · 서경(西京)과 함께 삼경(三京)의 하나였다. 문종 때에 남경이 설치되고 숙종 때에는 남경건도(南京建都)가 있었고 예종 이후도 남경으로 인정 받았으며 고려말에는 한양천도론(漢陽遷都論)이 분분했다. 우왕 · 공양왕시에는 풍수도참설에 의해서 개경의 지세가 쇠퇴했다는 주장에 따라 잠시 한양에 천도한 일이 있었다.
이태조는 건국과 함께 한양전도(漢陽奠都)를 실행하였으며 태종시에 이르러 조선 5백년 도읍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한 나라의 수도인 한양은 정치의 중심일 뿐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그 나라 문화의 정수(精粹)는 도읍에 모이는 것이며 도읍은 화려하고 사치를 하게 된다. 지방에 있는 사대부가 벼슬을 하면 서울로 오게 되고, 외직으로 돌던 관원들은 내직으로 옮기는 일은 바로 출세를 뜻해서 도내에 들어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수도는 외래문물이 맨 처음 들어와서 정착하는 곳이다. 그 당시에는 중국은 가장 선진국이요 강대국이었으니 중원(中原)의 문물은 사신의 왕래나 교역을 통해서 먼저 한양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외래문화가 가장 먼저 전래하는 곳이기도 했다.
내국문물의 수(粹)를 모았고 수준 높은 중국문물을 수용한 곳이 한양이었으니 화려하고 세련된 것은 당연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서울에서도 편전(便殿)이라 해서 석전(石殿)이 상원(上元) 에 만리재에서 있었다고 한다. 석전의 분포는 거의 전국적이었으니 서울지방에도 전승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상원 밤에
답교(踏橋)하는 풍속이 있었고 수표교와 광교에서 성행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방에서의 답교놀이는 그냥 교량을 왕래하는 것이었으나 한양에서의 답교는 사람의 왕래가 많으므로 양반들이나 부녀자들은 번잡을 피하기 위해서 하루 전인 14일이나 하루 후인 16일에 다리밟기를 했으니 양반다리밟기라 불렀다고 한다.
답교를 위해서 도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므로 임시의 목노집 주막이 전포를 벌리고 또 흥에 겨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하였으며 선소리패들에 의해서 한바탕 놀이판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서울에는 궁장(弓場)이 많았고 택견이 전승되었다. 평상시에 궁술을 익히고 택견으로 몸을 단련해 두었다가 유사시에 활용하게 되었을 것이니 수도이기에 필요했고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궁중놀이의 하나인 투호놀이(投壺놀이)가 있고 음악에 있어서는 아악(雅樂)이 전승되어 있다. 투호놀이(投壺놀이)는 서둘지 않고 의젓했으며 많은 궁녀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가능했고 아악은 궁중의례와 종묘 · 문묘의 제의(祭儀)에 주악(奏樂)으로 연주되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수도였기 때문에 역사성을 배경으로 해서 민속문화도 성립되고 전승되고 유지되어 왔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지방의 것과는 달리 우아하고 의젓해서 높은 차원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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