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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환경은 민속문화를 낳는데 큰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서로 어울려서 협동하여 살기 마련이다. 같은 자연조건 아래 같은 역사성 속에서 오래 살다보면 그 사회 나름의 문화와 민속이 형성된다.
사람의 의식이 같으면 유사한 생각을 하게 된다. 불교 · 도교 · 유교의 영향으로 그에 준하는 종교관 · 윤리관을 가지고 살다 보면 같은 생활습관을 가지게 된다. 수복다남(壽福多男)을 행복의 기초적인 조건으로 여겼던 사회에서는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산신 · 서낭 · 부처나 자연 속에 신을 설정하고 신앙하고 제의하게 된다.
남산 위에 국사서낭사(國師서낭祠)를 짓고 왕실에서도 치성하고 도민이 숭상하게 되고 도성 안의 잡귀와 부정(不淨)을 몰아내기 위해서 세말(歲末)에 방포(放砲)하는 관습은 오늘날에도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서울특별시장이 종각의 종을 타종하는 것으로 계승되어 있다.
서울에는 기방문화(妓房文化)가 있었다. 기녀가 한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도처에 있었으나 수도로서 정치 · 행정 · 경제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살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어 자주 주연석(酒宴席)이 마련 되었고 기녀가 있어야만 했다.
기녀는 중세의 종합예술인이다. 시를 해득하고 읽으며, 작시(作詩)까지도 해야 했다. 가야금 · 거문고를 한바탕 탈 줄 알아야 하며 판소리 · 민요를 불러야 했다. 사군자(四君子)를 그리고 글씨를 써야 했으니 서화(書畵)를 했고, 맵시있게 춤을 춰야 했으니 종합예술인의 칭호를 받을만 하다. 기녀들이 이와 같이 고차원의 종합예술인으로서의 수련을 쌓는 것은 고관대작이나 경제적 여유있는 양반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화하고 시정(詩情)에 잠기려면 같은 지적 수준에 있어야 했다. 경(京)이라는 사회환경 속에서 기방문화가 생겨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서울과 경기인을 가리켜서 경중미인(鏡中美人)이라 했다. 가꾸지 않아도 미인이 아니라 거울 앞에서 예쁘게 단장한 미인이라 하였으니 가꾸고 다듬은 미인 즉 외형만은 미인이라 허세를 부리므로 비로소 미인이란 뜻이니 진정한 마음으로부터의 미인은 못 된다는 뜻이다.
경사회(京社會)는 일찍이 도시화되어서 많은 인구가 모여 살으니 서로 상조(相助)하는 기풍이 적고 정보다는 논리 · 실리가 앞서는 사회가 되었으며, 또 일찍이 외래문화가 들어와 수용 정착되어 외래문화에 의해서 전통적인 관습이 퇴색하기 쉬운 곳이다. 도읍이기에 겪는 민속의 수난이 있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이념의 구현이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제례(祭禮)와 조상숭배가 왕성해서 생활의 규범이 되었다. 육조(六曹) 중에는 예조가 있어 예의가 숭상되었다. 가정이나 사회에 있어 예는 사람의 윤리의 중요한 부분이며 질서와 겸양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것으로 실천하도록 애썼다.
제(祭) 역시 예(禮)와 마찬가지로 자손의 도리이며 정중하고 엄숙하게 진행해야 했다. 장손집에 사당을 모시고 기일이 되면 자손들이 일당(一堂)에 모여 제례를 거행하는 미속(美俗)은 철저했다. 이와 같은 사회에 살아온 한국인은 근대화된 오늘날에 있어서도 제례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 강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성균관 대성전에 있어서의 석존(釋尊)의식은 유생들의 제의(祭儀)의 규범이 되어 전국의 향교(鄕校)는 이에 준했으며, 종묘제례는 사대부는 물론 국민들의 제의의 규범이 되어 왔다. 이와 같은 전통사회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최근에는 설 ·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귀성객으로 교통이 혼잡을 이루는 것은 고향에 내려가서 차례(茶禮) 지내고 성묘하는 추원보본(追遠報本)하는 행위가 주된 목적임을 알 수가 있으니 유교사회의 뿌리깊은 조상숭배사상을 엿볼 수가 있다.
이태조가 동구릉(東九陵)의 자리를 잡고 돌아오는 길에 도성이 바라보이는 고개에 이르러 도성과 동구릉 쪽을 쳐다보고 ‘이제는 죽어도 근심을 잊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여 망우리(忘憂里)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니 나라와 사후의 일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풍수설은 조상숭배사상에 의해서 더욱 왕성해졌고 보급되었으니 한국민의 마음 속에 뿌리가 깊다. 한국인이 명당을 찾아 묘를 쓰고 집을 짓는 것은 풍수설이 생활화한 사회에 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 사회환경에 젖었기 때문이다.
같은 사회환경 속에서 생활하면 같은 의식 · 같은 언어 · 같은 민속문화를 낳게 된다. 유교적 사고방식이 철저한 것도 그렇고 같은 언어로서 서울말이 특색이 있는 것도 그렇고 민속문화에 있어서도 경풍(京風)을 지니는 것은 수도라는 사회성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정치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참사상(讖思想)이 현저했고 노래에 있어서도 기방가요(妓房歌謠)가 유행하였으며, 인구는 많고 수도가 없었던 시대라 물장수 같은 직업도 등장했다.
당악(唐樂)을 수용한 아악(雅樂)이 전승된 것도 국가의식 또는 궁중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보존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양의 민속문화는 고차원의 우아성을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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