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의 침전은 대궐에서도 가장 깊은 곳, 그야말로 구중심처(九重深剔8라는 말로 명실상부하다.
왕의 침전이 현존하는 곳은 창덕궁(昌德宮)의 대조전(大造殿) 외에 덕수궁(德壽宮)의 함녕전(咸寧殿) 뿐이다. 덕수궁은 애당초 경운궁(慶運宮) 시절부터 넓지 않았던 데다가 일제초 명례궁(明禮宮)[註]이 헐려나갔기 때문에 더욱 협소해져서 함녕전이 그리 깊은 곳으로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창덕궁의 경우는 다르다.
대조전은 문서상으로는 왕의 침전이 아니다. 『궁궐지(宮闕志)』에 나와 있는 ‘대조전(大造殿) 곤전정당야(坤殿正堂夜8’라는 대목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일반적 통념으로 생각할 때, 침전이 침실 하나만이 아니라 모든 부대시설이 다 갖춰진 살림집인 이상 왕의 침전과 왕비의 침전이 별개의 개념일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며, 왕과 왕비의 집이 다르다는 것은 한 세대의 5∼600명의 궁녀를 거느리는 왕의 자유를 대변해 주는 사실이다.
즉 바꿔 말하면 왕은 일정한 침소가 없다는 뜻도 된다. 그것을 입증이나 하듯이 창덕궁을 본궁으로 쓰기 시작한 성종 이후부터 대한제국말까지 대조전에서 생을 마친 왕은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 효종, 철종, 순종 등 5명밖에 없다. 그 나머지 왕 중에 경희궁, 경복궁, 덕수궁[경운궁(慶運宮)] 등을 쓰던 경우는 별개의 문제지만 그 외는 대체로 본실과 사이가 좋지 못한 영조[초비(初妃) 정성왕후 서씨]와 정조, 헌종의 경우는 왕비가 있는 창덕궁 쪽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 창경궁에서 생활하였던 것이다. 특히 헌종의 경우, 본실로서 계비인 명헌왕후(明憲王后)를 초야에 소박놓고 후궁 경빈 김씨를 사랑하여 낙선재(樂善齋)를 지어주고 함께 살다가 낙선재 북쪽 중희궁(重熙宮)에서 생을 마쳤던 것이다. 그러나 ‘피접’이라는 민간신앙이 있어 병중에 길방(吉方)으로 거처를 옮기는 경우도 있어 최후의 장소가 반드시 평소에 기거하던 집이 아닐 수도 있다.
18대 현종은 1남 3녀의 대군(후의 숙종) 공주 외에 서자 한명 보이지 않는 품행 방정한 왕이지만 그 승하한 곳은 창덕궁 재실(齋室) 양심합(養心閤)이다. 순조말의 ‘궁궐도(宮闕圖)’에 의하면 양심합은 대조전 남랑(南廊)으로 나와 있고 철종 8년 순조비(순원왕후 김씨)가 승하한 곳도 양심합으로 되어 있어 그 사이 변동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즉 순조 33년 대조전 큰 화재 후 이를 재건할 때 제실의 양심합 재목을 옮겨다 지었거나 아니면 ‘재실’이란 기록은 오기(誤記)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재실을 옮겨다가 침전 행랑채를 짓는다는 가정은 개연성이 희박하다.
이처럼 동가숙 서가식(東家宿 西家食) 하는 왕과는 달리 왕비는 죽는 날까지 대조전을 못 벗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유독 왕비만을 대우하는 것 같이 대궐 정침(正寢)을 ‘왕비의 정당(正堂)’이라 못박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예 정실(正室)을 소박해 놓은 위의 몇몇 왕 외에는 비록 침전을 각처하고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대조전을 들리는 날도 있을 것이며, 순종은 1926년 6월 이 집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으므로 대조전을 일단 왕의 침전으로 간주하여도 좋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