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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대조전(大造殿)은 순종이 아직 생존하고 있었던 1917년 11월 큰 화재로 2년만에 다시 재건한 건물들이다.
옛 궁궐도(宮闕圖)와 비교해 볼 때 없어진 건물도 있고 구조 변경도 눈에 띄지만, 침전의 정당(正堂)인 대조전은 지붕의 선을 비롯하여 그 전체의 넓이에 있어서는 바뀌어진 것이 없다고 한다.
대조전 건축의 양식은 남북으로 쪽(고랑)마루가 붙은 6간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큰 방 하나씩이 있는 정당(몸채)과 또 이 정당을 중심으로 약간 지붕의 높이가 차이지는 좌우 익각[翼閣 (새채)]이 이어진 소위 삼산형(三山形)의 지붕이 남향하고 있다. 이 정당과 익각을 합친 안채가 다시 남으로 꺾여 아담한 정원을 가운데 두고 구자형(口字形)으로 서쪽은 작은 방들로 이어지고 동쪽은 행각(行閣)으로 이어져 옛날 같으면 신을 벗지 않고도 길고 긴 복도를 거쳐 마지막 인정전(仁政殿) 동행각(東行閣) 끝까지 닿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대조전 건축양식의 특징은 정당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보통 건물같이 지붕의 선이 일자형(一字形)이 아니라, 암기와와 숫기와로 세로 골이 길게 파여지는 기와지붕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 기묘한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있다. 이같은 집을 ‘무량각(無梁閣)’이라 하며 경복궁의 교태전과 창덕궁의 통명전 역시 무량각이었으나 교태전은 대조전 화재 복구 때 헐어다가 지은 관계로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두 집 뿐이다.
용마루 없는 집의 뜻은 왕의 권위와 직결된다. 즉 왕은 천의를 받들어 지상을 다스리는 까닭에 하늘과 이어져서 중간에 누르는 용마루가 필요없다는 뜻이다. 이것으로 보면 역시 대조전을 비롯한 대궐 정침은 왕비의 집이라 했지만 왕의 침전으로도 간주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통명전은 대대로 대비들이 썼지만 창경궁의 정침(正寢)으로 그 본래의 뜻은 다를 바 없다.
그밖에 장대석(長大石)으로 다섯 단(段)이나 기단(基壇)을 쌓은 위에 집을 앉힌 구조라든가, 또 하나는 통명전에는 없는 ‘월대(月臺)’라 하는 앞마당의 돌 무대(舞臺)이다. 대청에서 삼단 층계를 내려온 곳에 동서로 약간 긴 장방형의 8평가량의 면적인데 3면에 층계가 달려있다. 궁중에 경연(慶宴)이 벌어질 때 바로 여기에서 기생들이 화관(花冠)을 쓰고 원삼 소매 끝에 5색 한삼을 끼우고 궁중무를 연출하였다.
현재 월대 네 귀퉁이에는 청동으로 된 물동이 같은 그릇이 놓여있다. 그 중 입이 작고 전이 있는 것을 ‘부견주’라 하여‘동짓날 팥죽 쑤던 솥이 왜 여기에 와 있는가’고 놀라던 고(故) 김명길 상궁[註]의 말이 생각난다. 나머지 2개는 ‘두무’라 하며 평상시에는 방화용으로 물을 담아 두었던 그릇이다.‘두무’는‘두모포(豆毛浦)’란 지명(오늘날 성동구 옥수동)도 있듯이 자배기 같은 그릇의 옛이름이다. 방화용이라 했지만 이는 현대적 해석이고, 옛 사람들은 여기에 물을 담아두면 화신이 들여다 보고 자기의 험상궂은 얼굴 때문에 도망쳤다는 속신(俗信)에 의해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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