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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전(寢殿) 중에서도 왕과 왕비의 침실이 있는 곳은 정당(正堂)이다.
앞뒤로 달린 툇마루를 제외하고도 12평은 됨직한 대청을 중심으로 동서로 큼직한 방이 있는 것은 어느 대가댁 안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네짝 미닫이로 된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큰 방이 중앙에 하나 있고 그 둘레에는 미닫이문으로서 칸을 막은 조그만 방들이 그림에서 보듯이 현재로서는 5개가 ㄱ자로 이어져 있다. 그리하여 모두 6개의 방이 되는 셈이지만 대조전의 이같은 구조는 1919년 재건했을 때 변조된 것이다.
원래 왕의 침실은 정자형(井字形)의 9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같은 구조는 서온돌도 마찬가지여서 중앙 한 가운데 방에서 왕(혹은 왕비)이 침수하시면 그 외곽 둘레의 방에서 노상궁들이 상직(上直)을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현재 대조전 동서온돌의 구조도 현실적 쓰임새를 위주로 비록 6개의 방으로 구획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림에서 보듯이 전면 마루방(현재 카페트가 깔려 있음)까지 포함시켜 보면 어김없이 옛날 침실의 양식대로 정자방(井字房)의 기본 구조로 건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자방의 원형은 화재 전의 대조전은 물론, 경복궁의 교태전이 그러했다는 것이며 덕수궁의 함녕전도 9개까지는 안되지만 역시 6, 7개로 나누어져 있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방은 중앙이 아니라 전면의 방이었다. 함녕전은 대조전과는 달리 장방형이며 크기가 일정한 것으로 미루어 신변의 호위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도 원래의 의도는 왕의 침실이 어디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목적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을 입증이나 하듯이 10세 무렵에 을미사변을 직접 겪은 고(故) 조운서상궁에 의하면 왕비 민씨를 살해하러 난입해 온 일인 폭도들이 이 방 저 방을 뒤지고 다녔을 때만 해도 동서 온돌에 모두 18개의 방이 똑같은 구조였다는 것이다.
동서 온돌이 각각 왕과 왕비의 방이라 했는 바, 왕이 내전에 들어오는 날은 왕비 편에서 동온돌로 가는 것이 궁중법이다. 한편 미망인인 대비나 대왕대비들의 침전도 역시 대청을 중심으로 동서 온돌의 두 방이 있지만 낮 동안 거실로는 동온돌을 쓰더라도 잘 때는 서온돌로 가는 것이 궁중법이다. 1966년 2월까지 생존한 순정황후 윤씨도 서온돌을 침실로 쓰다가 돌아갔다. 목욕을 하고 서온돌로 나와 운명을 했는데 바로 그 옆에 욕실이 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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