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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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용어로 이부자리를 ‘기수’라 한다. ‘오늘밤은 동온돌에 기수 배설하여라!’는 왕과 왕비가 침실을 같이 쓰는 날 저녁, 큰방상궁이 생각시에게 왕의 방에 이부자리를 깔라고 명령하는 말이다. 이부자리는 두 벌을 나란히 펴는데, 고종은 무슨 까닭인지 프디(요) 대신 보료를 세개 나란히 깔아 놓았다는 것이다[삼축당(三祝堂) 증언]. 이는 덕수궁 시절 엄비(嚴妃) 생전은 물론 사후에 고종이 혼자 침수(寢睡)하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한다. 고종의 보료는 보통 초록색 궁초(宮쿑) 또는 무문(無紋) 제병(목공단 같은 것)으로 하고 베개는 1인용으로 조그마했다 한다.
순종은 비록 항간에서 그 규방생활에 대해 구구한 억측을 했다지만 1주일에 이틀 왕비와 침실을 같이 썼다 하며, 이는 자의라기보다는 큰방상궁의 인도였다 한다. 그것은 옛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궁중 법도이며 큰방상궁은 엄격한 가풍의 사대부가와 마찬가지로 일진(日辰)을 보아 길일을 가리어 두 분의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형식일 뿐 순종 같은 분이라면 일생이 불문율을 지킬 수가 있었겠지만 다른 왕들은 소년시절에는 몰라도 반드시 그 명령을 따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비가 동온돌로 드는 날 밤, 이를 인도하는 것은 왕비를 모시는 지밀노상궁이다. 이 때 왕비의 복색은 낮과는 달리 분홍색 소고의(저고리)에 남치마를 입고 옷고름에는 작은 노리개 석줄[소삼작(小三作)]을 차고 머리모양은 ‘조진머리’로 빗는다. 분홍 저고리 밑에는 미색[두록(豆綠)]이나 보라색 속저고리를 받쳐 입고 또 그 밑에 셔츠 대용으로 겨울이면 부드러운 서양사(西洋紗), 여름이면 모시로 만든 한삼[汗衫(적삼)]을 입었다.
이 때 방문을 열어서 왕비를 들여보내고 방문을 닫아 드리고는 즉시 생각시들은 지밀에서 퇴거해야 된다. 생각시 뿐만 아니라 50대 후반 중년들도 이날 왕의 침실 근처에는 얼씬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날도 왕의 유모를 비롯한 60, 70대 노상궁들이 사방 우물 정자 외랑 방에서 한방에 한명씩 직숙한다. 그 방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장지문으로 격해 있지만 열어 놓고 자는 것이 관례이다.
침실에 들어온 노상궁은 금침(衾枕)을 보살핀 다음, 머리맡에 물수건, 초인종, 지(요강) 및 타구를 대령해 놓고 오봉촛대에 꽃인 황촉 촛불을 입으로 불어 하나씩 끄고 방문(미닫이)을 닫고 물러나온다.
왕의 침실에는 절대로 세간을 놓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나인 자신들도 모르겠다고 하나 아마도 왕의 신변 보호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즉 신라 때 ‘약밥’[약반(藥飯)]의 유래가 되는‘사금갑(射琴匣)’의 고사 이후의 금기가 아닌가 한다. 또 방바닥도 일반 사서인(士庶人)의 집 구조와는 다르다. 즉 방바닥에서 2인치 가량 위로 공간을 두고 베니아판 위에 장판을 깔았는데 이는 귀하신 옥체에 덥고 찬 기운이 직접 닿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조전의 동서 온돌이 바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