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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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덮는 이부자리나 베개[금침(衾枕)]는 색채나 천이 화려하다는 것은 접어 두고 종류가 많다는 사실이 특기할만 하다.
우선 베개를 보면 자수 다자인에 따라 구봉침(九鳳枕) · 쌍학침(雙鶴枕) · 쌍룡침(雙龍枕) · 금슬종고악침(琴瑟鐘鼓樂枕) · 십장생침(十長生枕) · 반도침(蟠挑枕) 등 다양하다. 또 이부자리 역시 춘하추동에 따라 솜의 두께 유무 및 누비의 종류 또 겉이불, 속이불 등 종류도 다양할 뿐더러 명칭도 화려하다. 즉 솜이불, 핫이불, 겹이불, 누비이불, 천의(?衣) 등인데, 천의는 민간에서는 애기 업을 때 쓰는 포대기를 의미하지만 궁중어로는 겉에 포개어 덮는 덧이불이다.
누비이불의 종류는 그 누비질의 소밀(疏密)과 형태에 따라 세누비, 중누비, 오목누비, 납작누비 등이 있고, 보통 이불의 경우 궁중에서 애용되는 색채의 다양성은 민간과 다른 특성을 발견한다. 즉 노랑이불과 남색이불 및 요이다. 고종 19년(1882)에 있은 왕세자(순종) 가례 때 궁중에서 준비한 ‘금침목록’에 의하면, 모두 560채로 자주, 남, 노랑[송화색(松花色)], 양감(洋監), 일람(日藍), 남송[南松(연두)], 분홍 등이며, 본바탕색에 맞춰 다홍, 초록, 남색 등의 깃을 달았다. 천의는 제색으로 깃을 안 달고 보라색이 끼어 있어 이 역시 민간에서 쓰지 않는 색채이다.
민간에서는 신부의 이부자리에 남색을 ‘남남이 된다’는 기우로 꺼리는데, 궁중에서는 그렇지 않는 듯 싶고, 노랑이불 역시 민간에서는 별로 쓰지 않는 색깔이다. 이는 고려시대 노랑치마 노랑이불 이용의 풍속이 조선시대 궁중에 전래된 것이 아닌가 본다.
이밖에도 궁중 금침의 경우, 홋이불 시치는 방법이 민간과 다르다. 즉 흰 서양목(西洋木)이나 서양사(西洋紗)를 이불 표면에 넘어오지 않게 거죽과 똑같이 시침으로서 이불을 폈을 때 흰 천은 보이지 않는 대신 이불감과 같은 비단의 흰 동정[령(領)]을 단다. 천의는 홋이불을 안 시치고 동정만 단다. ‘프디잇’즉‘요잇’은 넘어오게 시치지만 민간과 같이 넓지는 않았다.
그러나 위의 560채라는 놀랄만한 이불의 수효는 특별한 경우의 ‘금침목록’이니 평상시 궁중에서 그만한 양의 금침을 쓰고 있다고는 할수 없고 더욱이 왕이라 하여 무조건 사치하고 호화를 누린다고 생각하면 오해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한중록(閑中錄)』과 같은 궁중관계 문헌에 의하면 영조와 정조는 일생 명주이불도 사치라고 물리치고 무명이불만 덮었고, 고종 역시 검박을 숭상하여 두루마기 안도 기워 입었다고 삼축당(三祝堂) 김씨와 상궁은 증언하였다. 옛 우리 선조들은 ‘복은 아낀다’는 소위‘석복(惜福)’의 철학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