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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상은 외상[독상(獨床)]이다. 궁중에서 원래 겸상이라는 것이 없다. 순종의 생존시절 왕과 왕비는 한 자리에서 수라를 들었는데 각기 외상이고, 일자(一字)로 좌(坐)하였다고 한다.[註]
왕의 수라는 반드시 쌀밥과 팥밥 두 그릇을 같이 ‘놓좁는 게’(놓자옵는 것이……상궁들의 말) 옛부터의 궁중 풍속이었다. 그러나 고종과 순종은 언제나 쌀수라만 드시고 팥수라는 뚜껑도 안여는 것이 예사였다.[삼축당(三祝堂)과 김상궁 증언]
‘수라’를 짓는 솥은 ‘새옹’이라 하는 골석제(滑石製)의 조그만 솥(곱돌솥)으로 여기에 쌀밥과 팥밥을 각각 꼭 두 그릇씩만 지었는데 화로에 백탄(숯불)을 담아 놓고 그 위에 곱돌솥을 얹어 은근히 뜸을 들여 지으면 쌀이 전국에서 이름난 지방의 특산미라서 그런지 밥 끓는 냄새가 흡사 잣죽 냄새 같았다(박상궁 증언)
왕이 수라를 들기 직전 옆에 시좌(侍座)하고 있던 큰방상궁이 먼저 음식 맛을 보는 것을 ‘기미를 본다’고 한다. 이는 맛의 시식이라기 보다 독의 유무를 검사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었으나 거의 의례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큰방상궁이 조그만 그릇에다 찬품(饌品)을 골고루 조금씩 덜어서 어전에서 자신이 먼저 먹어 보고 그 밖의 근시나인들과 생각시들에게도 나누어 준다. 왕의 어전에서 무엄한 것 같지만 궁녀들은 관습화된 것이라 조금도 이상하지 않게 여겼다. ‘기미’는 음식 뿐 아니라 녹용 · 인삼 등 탕제[湯劑(약)]도 마찬가지였다.
‘기미’용으로 수라상 위에는 왕의 ‘수저’외에 여벌로 은 혹은 상아로 된 저(箸)[註] 한벌과 조그만 그릇이 나오는데 기미를 본 후 큰방상궁은 이것으로 생선 등의 뼈를 발라 왕이 들기 편하도록 놓아드린다. 왕의 식탁이라 해서 언제나 산해진미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왕의 기호나 인생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 금침조(衾枕條)에서 언급했듯이 정조는 찬품(饌品) 서너 그릇 외에 더하지 않았다고 왕모인 홍씨는 『한중록(閑中錄)』에서 밝혔다.
주칠원상(朱漆圓床)과 그보다 적은 좌우 협반(挾盤) 위에 왕의 기호대로 찬물이 올라가는데, 고종도 순종도 짠 것, 매운 것을 못 들었으며 특히 순종은 치아가 약해서 깍두기도 무를 삶아서 담갔다는 것이다.
식기는 모두 은반상기이며 접시라는 것은 아예 없고, 반찬도 뚜껑이 달린 조그만 ‘은합’에 담는다. 고종과 순종대에는 은합에 일본인들의 소위 가문(家門)의 상징인 ‘문장(紋章)’을 따라 한국 왕실이 제정한 가문(家紋)으로 이화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왕이나 왕비의 수라그릇은 남녀 구별없이 민간에서 쓰는 것보다 두 배는 큰 합(盒)과 바리(鉢里)의 중간 같은 은기며 수저 역시 은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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