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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양반 특권 중의 특권은 과거에 응시하여 고급관직에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응시자격은 중인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잡과(雜科)라 하여 기술직이며 그 출세의 한계점이 정4 · 5품에 그쳤다. 중인 중에 대신(大臣)까지 된 사람은 대원군 때 변원규(卞元珪8라는 사람과 사민평등(四民平等)으로 계급제가 폐지돤 고종 31년 갑오개혁 후의 고영희(高永喜)의 단 두 사람 뿐이라 한다.
다음으로 양반 특권의 하나는 병역(부역도 포함)의 면제이다. 뿐만 아니라 지조(地租) 외에는 모든 세금이 면제되었다. 양반은 호적이 없는데 원래 호적이란 병역과 납세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때문이다. 이점 백정도 마찬가지지만 백정의 경우는 인간 이하의 대우에서 나온 차별대우인 것이다.
양반은 또 죄를 졌을 때 재판과정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상민 같으면 판 위에 엎어져서 태(笞)나 곤장[棍杖(죄의 경중에 따라)]으로 볼기를 맞는 것이지만, 양반은 서서 종아리를 걷어 올리고 휘초리[달초(撻楚)라 함]를 맞을 뿐이다. 그것도 후세에 내려와서 자기 집 종으로서 대신 맞게 하는 제도도 있었다. 흥부전에서 흥부가 돈을 받고 ‘대리매’를 맞으러 가는 장면은 이런 경우의 이야기이다. 또 형신[刑訊(문초받는 일)] 받을 때도 상민은 땅에 꿇어 앉아서 받는데 양반은 선 채로 답변한다. 또 양반은 가옥의 구조에 있어서도 기와집에 살 수 있으며 소슬대문과 꽃무늬 놓은 담장과 누(樓)마루, 그리고 최고 평수 99간까지의 주택에서 살 수 있다. 물론 애초에 집을 짓거나 장만할 때 『경국대전』에 규제된 대로 품관에 따라 그 간수(間數)에서부터 약간 차이가 나지만, 그 주인공의 사후 벼슬 안하는 후손이 살 경우 경제적으로 지탱할 수만 있으면 지니고 살 수 있으니 결국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줄여가게 마련이다.
복식에 있어서의 특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는 양반의 특권이라기 보다 중인을 비롯한 상민(常民) · 천민(賤民)들은 복식 규제가 있다는 편이 적당할지 모른다. 모시는 9승(升)이 사대부용(士大夫用)이고 비단은 물론 경제적 형편에 따라 제한이 없으며, 청색 도포에 세조대(細條帶), 가죽신에 부채를 가진다. 또 4인교(四人轎) 이상, 품계에 따라 평교자(平轎子)도 탈 수 있다. 이상은 법적으로 받는 특권이지만 그 밖에 사회적으로 누리는 특권은 중인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양반에 바치는 경대(敬待)와 특별대우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길을 가다가 양반 행차를 만나면 피하든가 길가 논두렁에라도 내려가 엎드려야 하며, 여관에서 좋은 방에 자리잡았다가도 양반이 들어오면 양보하고 나가야 한다. 이 광경은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에 인상 깊게 묘사되어 있다. 즉, 같은 양반인데도 과거에 낙방하고 내려가는 도중이라 행색이 초라한 선비를 상민이라 보고 양반의 구종(驅從)이 휘초리를 들고 못들어오게 막는 장면이다. 마치 미국에서 흑백 인종차별이 심하던 시절의 이야기와 같다. 상민들은 양반에게 깎듯이 종이 상전에게 대하듯이 자기를 소인(小人)이라 낮추고 아무리 연소해도 아가씨, 도련님 또 서방님, 나으리라 바쳐야 하며, 담뱃대도 감추고 가야 하고 안경(개화 후)도 벗어야 했다.
신분에 대한 유별의식은 같은 양반이라도 문반은 무반을 아랫대로 간주하여, 예컨대 같은 ‘평산신씨’라도 상혼(相婚)을 꺼리는 풍토가 광복 전까지 서울 전통사회에 건재했었다. 개화기 무렵에도 어느 지방에서 군수가 부임하면 그 고을 대대로 내려온 명가(名家)에 인사를 가는 법이 있는데 군수의 가문의 지체가 자기 집보다 떨어진다고 하여 돌아간 뒤 구들장을 들어내고 다시 했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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