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문안은 조선시대 전통사회에 있어서 사대부가 풍속의 의례적인 관례로 되어 있었다.
그 애당초의 의의가 효에서 비롯됐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문안이란 안부를 묻는다는 뜻으로 아침 저녁 부모님을 보살펴 드리고 정신적 육체적 안(安)과 부(否)를 직접 여쭤보고 해결할 일이 있으면 해결해 드리는 효자의 마음 자세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랜 세월동안 사대부사회에서 관습화 되어 오는 동안 형식은 있고 내용에는 실(實)이 없는 의례화가 되어 버린 측면도 있다. 그 일례가 문안편지와 상류사회의 궁중 풍속을 본딴 문안비(問安婢)의 파견이다.
그런데 문안은 부모가 생존 중일 경우에 해당하고 세상을 떠났을 때는 사당전배(祠堂展拜)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하루의 일과가 효에서 시작하는 셈이니 그 효의 실천을 하자면 우선 부지런해야 된다는 논리에 귀착된다. 근면은 비단 조석 문안을 위한 사대부사회의 독점물일 리는 없고 계급을 떠나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이해에 직결되는 처신의 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사대부 처신의 도에서 남녀없이
「일 보고 밤 늦게 자고
새벽에 계명성(鷄鳴聲)과 더불어 일어난다[註]」
는 주부의 의무는 식구들을 위한 아침식사 준비에 앞서 이 문안례가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실지로 문안례의 형태를 고전이나 규훈류(閨訓類)에서 찾아 보기로 한다.
「선인(先人)께오셔 행실이 남다르오셔 날마다 새벽이면 사우(祠宇)에 뵈옵사오시고, 아침이면 계모(繼母)부인께 절하오셔 뵈옵고, 화(和)한 말삼이면 부드러운 색으로 섬기시니…[註]」
이것은 공주(公主)의 5대손가(5代孫家) 가장의 문안례의 한 모습이다.
「선비(先쯼)께오셔 <중략〉몸가지시를 예로 하오셔 아침에 일찍이 소세(梳洗)하오시고, 존고(尊姑)께 뵈옵기를 때를 어기오지 아니 하오시고, 머리를 얹지 아니코는 감히 뵈옵지 못하오시고 부디 작(作)저고리(三作三저고리)를 입지 않으실 때 없아오시고…[註]」
이 경우는 같은 집의 주부의 문안례의 모습이다. 공주(公主)의 후예가라고는 하나 조부가 차남으로서 본가에서 분가할 때 집만 한 채 얻어 가지고 나왔을 뿐 전재(錢財)를 나뉘옴이 바이 없이 위포[葦布 (직업 없는 선비)]로부터 가계(家計) 간고함이 심하던 살림이라 또 그 조부가 후에 벼슬을 했지만
「작위(爵位) 상서(尙書)에 이르시되 일심으로 청렴하오셔 산업을 다스리지 않으시고 문전이 소연하여 한토(寒土) 같으신지라[註]」
생전에도 어려웠는데 하물며 그 사후에는 더욱 찢어지게 가난하게 된 집이다. 그런데도 가풍은 남아 있어 계모와 계시모에게 그 집 내외주인은 지고지상의 예를 다해야 했던 것이다. 한편 이 예도(禮道)의 총본산인 궁중 문안례의 일단을 보면 아래와 같다.
「내 들어올 적(궁중에 세자빈으로) 문안하기를 감히 게으르게 못하여, 인원(仁元) · 정성(貞聖) 양성모(兩聖母)께는 5일에 1차씩 하고 선희궁(宣禧宮)께는 3일 1차씩 하나 날마다 뫼올(뫼실을) 적이 잦으니 그 때는 궁금법(宮禁法)이 지엄하여 예복(禮服)을 아니하면 감히 뵈옵지 못하고 날이 늦게야 못하기 새벽의 문안 때를 어기지 아니하랴, 하기 잠을 편히 자지 못하는지라.」
그래서 시집올 때 친정에서 함께 온 아지(유모)와 시비들을 훈련(訓練)시켜
「일찍 깨우기를 큰일 같이 하여 감히 태만치 못하게 하니 융동성서(隆冬盛暑)와 풍우대설(風雨大雪) 중도 문안갈 날이면 하루도 날이 늦지 않기는 차양인(此兩人)의 공이라 할 것이요[註]」
라고 치하하였다.
한편 19세기 말에 출생하여 1970년 초 80세 가까이 된 대한제국말의 종실 · 고관집 부인들의 증언[註]을 토대로 옛날 사대부사회의 문안 풍속도를 살펴 보기로 한다.
「아침문안
새벽 밝기 전 어둑할 때 일어나, 촛불켜 놓고 세수하고 화장한다. 세수는 팥비누를 쓰고 화장은 꿀을 먼저 바르고 때를 싹싹 밀어낸 다음 장문(박가분)을 바른다. 그리고 칠보족두리 쓰고 노랑저고리 다홍치마, 노리개 차고 소예복(小禮服) 정장을 하고 몸종의 전도(前導)를 받으며, 시부모님이 함께 계신 장소에 가서 문안례를 올린다.
절은 큰절이 아닌 평절 한번이며, 가만히 다시 일어나 짓고 [양수거지(兩手擧止)의 뜻] 섰다가 뒷걸음쳐 나온다.」
이 경우 절만 드릴 뿐이지 말은 없었다는 것이다.
「저녁 문안은 밤 9시경(저녁 식사가 끝나고 한참 후) 시아버지가 안에 들어오시면 시어머니방 방사람(상직이)이 기별해 주는 것을 기다려 몸종과 같이 간다. 몸종은 장지문만 열어 주고 대청에서 기다린다. 상지기가 없을 경우, 대개 시아버지의 기침소리가 신호가 된다. 아침과 똑같은 형식으로 문안례를 올리고 물러나 짓고 섰다가 ‘이제 물러가거라’하면 그제야 뒷걸음질쳐 나온다.」
그러나 문안례도 경우에 따라 형식에 치우치다 보니 부담이 되고 그리하여 말 없는 가운데 약간의 갈등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어느 새색시의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나 가도(家道)가 퇴색해진 집일수록 그런 일이 잦았다.
옛날에는 며느리가 새로 들어오면 시부모에 대한 문안례는 신분이 높을수록 그 기간이 길었다. 이런 경우 격식 따지는 집은 출산 후에도 계속되지만 보통은 첫아이의 임신으로 몸이 무거워지기 전까지이나 짧을 때는 1주일 정도였다. 안팎 노비를 거느리고 몸종까지 곁에 두고 있는 상류의 여인이라면 아침 일찍 일어난다 해도 문안례로 그쳐 식사 준비 · 집안 청소 등에 자신이 직접 주역이 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석달이고 1년이고 무관하지만 주부로서 임무를 직접해야 하는 가난한 선비의 집에서는 장기간의 문안례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알려주기 위한 문안례라는 격식은 현실적인 공리성(功利性)에서 차츰 퇴색해 간 것이다. 이처럼 하는 쪽과 받는 쪽 쌍방이 부지런해야만 가능했기 때문에 문안례는 대개 의례에 그치는 수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