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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안 편지나 문안비(問安婢)의 존재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사대부사회에 있어서 대가정 내의 조석 문안이 대외로 연장되는 풍토의 부산물이다.
내외법에 묶여 여성들의 외출이 제한되어 있는데다가 특히 상대가 구중금중(九重禁中)의 귀한 신분일 때는 왕비의 어머니라 해도 명분 없이는 아무 때나 궁중을 드나들 수 없기 때문에 특히 왕실과 관련이 있는 상류 사대부사회에서 문안 편지가 성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왕실과 척연(戚聯)이 없다 하더라도 상류지향의 풍속의 통성은 비록 몰락한 양반의 후예라 하더라도 여성들의 교양의 하나로 ‘문안 편지 쓰기’는 필수 조건이었던 것이다.
「‘아버님 前 상살이(上白是)’
‘아주마님 前 소 상살이’」
란 옛날 내간(內簡)의 투어(套語) 가운데 ‘상백시(上白是)’[상살이, 상서(上書)보다 더 높인 말]는 신라 이두의 잔재이지만 1930년대 까지도 일부 전통사회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문안 편지의 전형적 형식은 궁중봉서(宮中封書)이다. 대개 본댁(왕비 친정)에 내리는 답서들이지만 왕비나 세자빈의 친필인 경우도 있고 궁녀의 대필일 때도 있다.
오늘날 민간에 전하는 문안 편지는 대개 긴 내용의 내간(內簡)일 때가 많다. 그것은 편지들을 보관하여 성책(成冊)한 여인의 가치관으로서 후손들에게 문범(文範)이나, 그 내역의 전달을 염두에 둔 선택기준에서 틀에 박힌 문안에 그치는 간단한 것은 남기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아래에 문안 편지의 전형과 그밖에 여기서 출발한 상류사회 여인들의 내간의 몇개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문
안 엿잡고 오간(午間)
옥후(玉后8 만안하아오시압고
샹후(上候) 안녕하오시압고
동궁(東宮) 태평하오신디 아압고
져 바라압나이다
쇼인 판서집[註]」
여기 문안의 대상은 옥후(玉后8의 주인공인 조대비와 상후(上候)의 주인공인 고종, 동궁인 후의 순종 세사람이다. 왕비가 빠진 점으로 미루어 을미사변(1895) 후부터 엄비가 부상하기 전(영친왕 탄생 전 : 1897)까지 사이에 조대비 친정이나 민비 친정계 판서집에서 보낸 편지로 보인다. 위의 글은 대개 궁중이나 사대부가에서 썼던 고급 저주지[楮注紙(중국산)]에 종서로 쓴 점이 다를 뿐 원문대로 옮긴 것이다. 봉투도 같은 종이로 만든 것이며 오늘날과 다른 점은 봉투의 표면과 뒷면이 오늘날과 반대라는 사실, 매일 두번씩 하는 편지라 연월일이 없다는 사실이 특징이다.
「봉셔보압고
긔운 평안하오신 일 아옵고 든든하
오며 여긔셔난
샹후 문 안 만안하아오시옵고
동궁의셔도 태평하시니 축슈
하옵고 예난 한가디외다.[註]」
이는 앞의 편지에 대한 조대비의 답서이다. 상[上 (고종)]과 동궁의 안부 다음에 ‘예난’이라는 자신의 안부는 제일 뒤에 언급한 것이다. 이렇듯이 원래 문안 편지는 문안에만 그치는 간략한 것이다. 이렇듯 문안 편지는 형식적 의례적 일상성에 불과한 것이었든, 효의 미덕이었든 간에 봉건 폐쇄사회에 또는 우리 여류문학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외출도 마음대로 못하던 시절, 여성들은 이것을 통하여 육친과 친척간의 정의의 돈독은 논외에 두고라도 하나의 의사 교환의 사교수단으로서 그네들의 욕구불만이 다소나마 해소되었을 것이고, 다음은 관습에 의한 타율적 문장 수련이 여성들의 문장 수련에 도움을 주어 궁중문학, 사녀(士女)들의 문학으로 피어난 것이라 보는 관점에서이다. 한중록(閑中錄) · 계축일기(癸丑日記) · 숙창궁일기(淑昌宮日記) · 산성일기(山城日記) 등은 바로 궁중의 그 열매들이며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 · 조침문(弔針文) · 해남윤선도가(海南尹善道家)에 전하는 문학성이 풍부한 13m 장문의 여원(女怨) 맺힌 진정의 편지도 사대부사회의 열매들이다. 물론 봉건윤리의 터부로 인하여 인위적 도태인 세초(洗草)나 자연적 소실의 여과를 거쳐 오늘날 남은 것은 실로 그 편린(片鱗)에 불과하지만 영성(零星)한 국문학 유산을 위해서 또 사대부사회의 전통적 풍속을 위해서도 귀중한 자료인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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