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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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라는 말은 오늘날 젊은 세대들은 그 뜻조차도 알 수 없는 골동품이 되어 버렸지만 불과 반세기도 못되는 사이의 일이다. 조선시대에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이 정치철학으로 받아 들인 송유(宋儒)의 실천도덕 가운데 가장 혹독한 것이 정절숭상이었다. ‘훼절(毁節)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생각은 당사자인 여성 자신들도 종교와 같이 이 나라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재가(再嫁)를 죄악으로 알고 심지어 10대의 마당과부(약혼 중 상대가 죽은 여자)가 생겨나던 시절의 부산물이다. 남녀가 유별하므로 외간남자는 물론 같은 친족 간에도 4 · 5촌이 넘으면 규제가 많았다. 옛날 규훈여계서류(閨訓女戒書類)에는 사대부집 여인의 도에 이 내외법이 강조되어 구체적으로 여러 경우를 지적하였다.

「사오촌이라도 십세 후의난 한자리어셔 친친 말고 쌍육(雙六)치고 책을 보되 체례(體禮) 중케 하라」
「남매간이라도 잡되이 회화(會靴8마라[註]」

또 형수와 시동생 사이도 어려운 사이로 보고 있다. 『한중록』에 홍낙임(洪樂任)이 5, 6세 때 형수가 시집을 왔는데 모두 가족과 친지들이 그 방에 들어가서 신부를 보았지만 그는 어린이건만 수숙지간(嫂叔之間)이 어려운 것이라고 안들어갔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는 『사소절(士小節)』에

「슈숙이 병이 잇거든 가히 몸소 님하여 문후하지 말고 직각 문밧긔셔 무를지니…」

라 한 고훈(古訓)에 입각하고 있다.
이런 풍토는 신문명이 가장 빨리 수용되는 수도 서울에서도 1930년대까지도 내외법으로 말미암은 풍경이 사대부사회에 남아 있었다. 대문간에 손님이 와서 주인을 찾으면 안에서 주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리오너라. 김주사 계시냐고 여쭤라’
‘안 계시다고 여쭤라’
‘어디 가셨냐고 여쭤라’
‘사직골 이 교리댁에 볼일이 있어 가셨다고 여쭤라!’」

이것은 중간에 하인의 존재를 가정하고 간접적 대화를 하고 있는 셈이다. 비록 하인 하나 못쓰는 형편이지만 양반의 체면에 외간남자와 아녀자가 상면은 커녕 직접 대화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