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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보탑(寶榻)에 전좌(殿座)하사
군병방위(軍兵方位) 정한 후에
어악(御樂)이 일어나며
모대(帽帶)한 환시(내시)네가
어제(御題)를 고이 들고
현제판(懸題板) 임하여서
홍마색(紅麻索) 끈을 매어
일시에 올려 다니[註]」
여기까지는 왕이 과거장에 친림하여 시험제목을 내리니 내시(內侍)가 받들고 와서 제목을 걸어놓는 판대기[현제판(懸題板)]에 붉은 삼끈으로 매어 다는 장면까지 이다.
「만장(滿場) 중 선비들이
붓을 들고 달아난다.
각각 제 집 찾아가서
책 행담 열어놓고
해제(解題)를 생각하여
풍우(風雨)같이 지어내니
글하는 거벽(巨擘)들은
구구(句句)이 읊어대고
글씨 쓰는 사수(寫手)들은
시각(時刻)을 못 머문다.[註]」
시험문제가 현수막 같이 드리워지면 시험생들은 답안을 쓰는 단계인데, 위에서 보면 그 자리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각기 붓을 들고 제 집으로 찾아 갔다니 정해진 장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풍우 같이 실력을 발휘해서 답안지를 작성하면, 남이 그것을 불어 주고 또 정서(淨書)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춘향전』에 나와 있는 바로 ‘용사비등(龍蛇飛騰)하고 평사낙안(平沙落雁)이라’하여 필체가 힘있으면서도 아름다웠다고 하는 것은 본인의 필적이 아니었는지 이 표현 가지고는 알 수 없지만 잘 쓰는 사람이면 구태어 남의 정서(淨書)가 필요했는가 확실치 않다. 다음을 보면 더욱 대필제(代筆制)라는 것이 확실해 진다.
「글 글씨 없는 선비
수종(隨從)군 모양으로
공석(空席)에도 못 앉고도
글 한장을 애걸한다.[註]」
그래서 『한양가』의 작자는 자기의 목소리로
「부모선생(父母先生) 권할할 제
이런 토심 모르던가.」
이렇게 나무라고 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완성된 답안지가 모여드는 장면의 묘사이다.
「경각(頃刻)에 선장(先場)들어
위장군(衛將軍)이 외는구나.
한장들고 두장 들어
차차로 들어간다.
백장이 넘어서는
일시에 들어오니[註]」
그 모습이 신기전(神機箭)의 모양 같고 백설이 분분한 것 같다 하고 그 거둬들인 권수(卷數)가 ‘언덕 같고 뫼 같구나’했다. 답안지가 ‘백장을 넘어서고는 일시에 밀려온다’고 했으니 수백명의 응시자였던 것 같다. 시험관이 채점하는 광경,
「주문명관(主文命官)이 시관(試官) 앞에
수없이 갖다 놓네.
차례로 꼬늘 적에
비점(批點) 치고 관별(貫別)한다.[註]」
비비점(批點)은 중요한 대목 오른쪽에 찍는 점, 관별(貫別)은 관주(貫珠)로 구별한다는 뜻으로 잘된 구절에 동그라미를 그려 표시하는 평가 방법이다. 그 외의‘낙고지(落考紙)는 짐짐이 져서 낸다’고 했으니 당락의 판가름은 거의 난 것이다. 그 사이 결과를 기다리는 수험생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다음을 보기로 한다.
「선비의 거동 보소
우산 접어 둘러메고
공석(空席) 싸서 옆에 끼고
장원봉(壯元峯) 언덕 위에
잠복이 모여 서서
방(榜)나기 기다릴 제
보계판(補階板)을 바라보니
(필자 주 ; 장원봉은 창경궁 북쪽 경계선의 산)[註]」
라 있음으로 보아 시험장이 내려다 보이는 거리의 언덕 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담이지만 이 경우 과시장(科試場)은 창덕궁의 영화당(映花堂) 앞이 아니고 창경궁 장원봉(壯元峯) 밑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이에 앞서 과거가 시작되기 전 왕의 행차의 노순(路順) 설명에
「청양문(靑陽門) 나아갈 제 대답소리 웅장하다.
관풍각(觀豊閣) 지나시고 관덕정(觀德亭) 지나서서[註]」
라 있는 바, 청양문은 현재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의 위(명륜동 쪽으로) 월근문[月覲門(월근문은 현재 간판이 없으나 창경궁 사무실 입구문)] 못미쳐 도로변에서 조금 안으로 들어가 있는 문, 그 문을 들어가 왼편에 관풍각(觀豊閣)이 있고 여기에서 서북쪽으로 꺾어 올라가면 관덕정(觀德亭)이 나온다. 여기를 지나서 왕이 어탑(御榻)에 좌(坐)하였다 하므로 궁궐도(宮闕圖)에 나와 있는 비원 동북 끝 [태극정(太極亭)의 동북] 성벽 가까이에 있었던 일군(一群)의 전각(殿閣)을 가진 궁전인 것 같다. 궁궐도에 이 전명(殿名)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언저리의 산 이름이 바로 장원봉(壯元峯)으로 명륜동과 경계하고 있다. 따라서 앞에서 수험생들이 장원봉에 올라가서 쉬고 있다고 한 대목을 떠올리면 부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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