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자 발표, 장원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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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급제자 호명(呼名)까지의 광경을 보기로 한다.

「시관(試官)들과 육방승지(六房承旨) 어전(御前)에서 탁방(坼榜)한다.
설포장(設布帳) 지우고서 정원사령(政院使令) 불러내어
성명삼자(姓名三字) 써 내리니 정원사령 거동 보소
잔주름 방패 천익(天翼) 통량갓(統營갓) 젖혀 쓰고
달음박질 내려올 제
만장(滿場) 중 선비마음 심독희(心獨喜) 자부하여
가만히 듣는구나
여럿이 묶어 걸러 성명 석자 호명한다.[註]

합격자의 답안지 뭉치를 어전(御前)에서 뜯으면 육방승지(六房承旨)들이 그 자리에서 성명(姓名)을 써서 정원사령(政院使令)으로 하여금 바삐 호명토록 한다. 달음박질로 내려왔다고 했다. 다음은 급제자(及第者) 발표의 대목이다.

「적덕(積德)한 뉘집 자손 글 용한 어느 선비
십년 등하(燈下) 죽을 공부 금일 등과(登科)하였는고,
바삐 불러 올라갈 제 망건(網巾)을 고쳐 쓰고
도포를 갈아 입고 ‘여기 있다’ 소리할 제,
수십명 원령(院令)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부액(扶腋)하고 올라가니
어약용문(魚躍龍門)되었구나[註]

합격자 명단을 ‘누구 누구’하고 부르면 ‘네’라 하지 않고 ‘여기 있오’하는 풍속―합격자가 되기 이전에도 양반 자제가 일개 사령에게 ‘네’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또 호명된 사람이 어전(御前)에 올라갈 때 양쪽에서 부축해서 올라가는 광경도 그 예우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다음 합격자들에게 안겨지는 일생일대의 영광된 순간의 어주삼배(御酒三盃)와 어사화(御賜花)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어전(御前)에 예방승지 진퇴(進退)를 시키고서
사온삼배(賜춠三盃) 하신 후에 얼굴은 희묵(戱墨)하고
몸에는 홍삼(紅衫)이요, 머리에는 어사화(御賜花)라.[註]」

여기는 보이지 않지만 어주삼배(御酒三盃) 이전에 신은(新恩)들(과거 급제자의 통칭)이 관료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어전에 올라가서는 우선 왕께 ‘사은숙배(謝恩肅拜)’하는 것이 앞선다. 4배를 올리는데 이 경우도 신하가 크게 절하는 예절로서 정면인 북향 4배가 아니라 ㄱ자의 위치에서 올리는 곡배[曲拜 일명 협과(夾科)]이다. 즉 어전에서 종렬 두줄로 서서 서로 마주보고 하는 형식이다. 왕의 어전에서 신하가 드리는 절은 모두 이 형식이며, 이는 봉건사회의 전통예절로서 어른과 동좌(同坐)할 때는 절대로 마주 앉지 말고 ‘모꺾어 앉는다’는 처신법과 같은 것이다.
숙배가 끝나면 급제자들에게 왕의 하사품이 배부되는데 홍패(紅牌)와 관모(冠帽) 및 어사화(御賜花)이다. 홍패(紅牌)는 패(牌)라고는 하지만 궁중에서 쓰는 다홍 저주지[楮注紙(중국산)]에 쓴 일종의 신분증으로 박연암(朴燕岩)의 『양반전』에 ‘문과홍패는 불과 2척이나 백물비계(百物備界)’라 한, 도깨비 방망이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어사화는 모자에 꽂는 가화(假花)로서 문과에서 제3인(3등)으로 합격된 사람이 대표로 받아서 나눠주는 형식이다. 이 사람을 탐화랑(探花郞)이라 한다.
『춘향전』에는 문과장원한 이도령의 옷치례를 ‘머리에는 어사화요, 몸에는 앵삼(鶯衫)이라’고 하였고 위의 『한양가』의 기록에는 홍삼(紅衫)을 입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경우에 따라 후한 대우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왕실 풍속에 경사스런 잔치에 왕부터 가화를 꽂고 신하들도 이에 따랐다는 예를 정조 19년 화성행궁(華城行宮)에서 열린 왕모 혜경궁[惠慶宮 (사도세자의 빈궁)]의 회갑연 때의 광경를 쓴 『화성일기(華城日記)』에서 보기로 한다.

「주상(主上)이 금화(金花)를 꽂으시고 한 가지 꽃을 나눠 주오시는 지라, 각각 절하고 받자와 갓 위에 꽃을 새[註]」

미리 갓에 담뱃불로 구멍을 뚫고 온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시 꽂고, 아니한 자는 갓 위를 뚫고 꽂았다고 했다. 이밖에 재미있는 풍속은 ‘급제자 얼굴에 희묵(戱墨)’했다는 대목이다. 어전에서 어주삼배를 마신 후라 했으니, 얼굴에 장난으로 낙서나 무슨 점 같은 것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모자에 꽃을 꽂는다든가, 얼굴의 희묵이라든가, 문치국가 태평세월의 평화스럽고 여유있는 한폭의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끝나면 백관 하례식이 있었던 듯, 그런데 그 장소가 춘당대(春塘臺)로 나와 있으니 그 사이 자리를 옮겨 왔다는 이야기인지 『한양가』의 작자가 착각을 일으킨 것인지 알 수 없다.(앞서 장원봉 중턱 과거장에서 춘당지 곁 영화당 앞까지는 상당한 거리이다.)

「좌우의 백관(百官)들이 금관(金冠)에 금잠(金簪)을 꽂고
홍항라(紅亢羅) 고운 조복(朝服) 금환후수(金環後綬) 달았으며
양 옆에 패옥소리 걸음마다 쟁쟁한다.
시위군병 갑주하고 춘당대(春塘臺) 너른 뜰에
득인진하(得人進賀) 되는구나.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들이
산호(山呼)를 높이하니 천세 천세 천천세라.
구경도 장할씨고 문물(文物)도 거룩하다.[註]」

득인진하(得人進賀)란 어진 사람을 얻었다고 왕께 하례하는 식이고 산호(山呼)란 만세인 바 조선시대 중국 황제를 의식하고 ‘만세’를 못부르고 천세를 불렀다. 다음은 장원 급제자를 위시하여 모든 급제자들이 사물(賜物)을 받고 나오는 광경이니 자기 집까지 축하 행진하는 광경이다.

「장원랑(壯元郞) 개(蓋)[註]를 주고 그 남은 신은(新恩)들은
사복마(司僕馬)[註] 좋은 말게(말에게) 무동(舞童)주어 내보내니
궐문 밖 나올 적에 기구도 장하도다.
아침에 선비더니 저녁에 선달(先達)[註]이라.
화류춘풍(花柳春風) 대도상에 새마치 길군악에
무동은 춤을 추고 벽제소리 웅장하다.
춘풍득의마제질(春風得意馬蹄疾)[註]하니 탐화랑(探花郞) 되었어라.
남녀노소 관광(觀光)하고 누가 아니 칭찬하리.」

급제자들이 궐문을 나서면 악공과 광대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백마에 태워가지고 풍악을 잡히며 시내 행진을 벌인다. 특히 장원에게는 일산[日傘 개(蓋)]까지 높이 받쳐주는 것이다. 광대들이 걸어가면서 춤을 추고 곱게 차려 입은 무동들은 광대들 머리 위에서 춤을 추고 가는 광경은 평화스럽고 호사스런 광경이라 길가에는 구경꾼들이 모여 부러워들 한다.
이것이 소위 ‘유가(遊街)’라 하는 바 보통 3일 동안 계속된다. 그리고 각기 친지를 방문하여 인사도 하고 대접을 받는데 경우에 따라서 5일 유가도 있다. 이 행렬 앞에는 물론 양반의 행차와 마찬가지로 길 정리를 하는 가도(呵導)가 있어 호기있게 외치는 ‘에에, 물렀거라, 나있거라!’하는 소리가 백마에 앉은 당사자들에게 긍지와 권위의식을 심어 주는 최초의 선물이기도 하다.
유가와 친족방문에 이어 조상의 묘에 수분(授墳)하고 문묘에도 다녀오고 지방 출신의 경우는 그 지방의 명예라고 군수까지 앞장 서서 공비(公費)로서 축하연, 수분(授墳) 등을 돕고 대우가 극진함은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은근한 뜻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신래(新來) 급제(及第)에게 기합을 주는 폐습이 있어서 심할 때는 죽기까지 한 예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나와 있는 이야기인 바 풀이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신래변증설(新來辨證說). 우리나라 옛 법칙이 문무대소과(文武大小科) 삼방자(參榜者)의 선배가 반드시 후배에게 찾아가서 ‘신래(新來)’라 부르고 먹으로써 얼굴에 종횡무진으로 그리고 그 성명(姓名)을 거꾸로 쓰기도 하고 잿물[회즙(灰汁)]로써 이것을 씻어 엉망을 만든다.[註]」

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진퇴각보배추종종사위해괴지장(進退却步背?種種使爲駭怪之狀)’이라 하여 시키지 않은 행동이 없었다.
특히 무관의 경우는 더욱 심하여 얼굴에 그림 뿐 아니라 온갖 욕을 다 썼으며 단종 계유과(癸酉科)에 정윤화(鄭允和)라는 이는 마침내 죽기에 이르렀고 순조 중엽 모 무과 급제자는 다리가 부러진 예도 있었다. 그 밖에도 개천에 밀어 넣어 옷을 다 젖게 만드는 등 갖가지 횡포는 다른 책에도 많이 거론되어 혼석(婚夕)에 신랑을 매어달아 놓고 발바닥을 때리거나 그 밖에 기합을 주는 악습과 더불어 없어져야 할 폐습이라고 개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