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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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에는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의 두가지 종류가 있다. 공천이란 전란에 의한 부산물로서 포로가 된 자와 죄를 범해서 노적(奴籍)에 오른 자, 즉 부녀를 폭행했다든가 도적 등과 역적의 유가족 및 사형자의 처자 등을 연좌죄(連坐罪)를 적용하여 관청의 노비로 만들어진 사람들이다.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지방관청에는 최소한도 관노(官奴)가 30∼40명, 관비(官婢)가 10명 정도가 있어 온갖 잡역에 종사하였다. 관비는 관기(官妓)라고도 하며 그 중에서 젊고 인물 고운 여자는 수령(守令) · 방백(方伯)의 침석에 참예하여 남성들이 평양감사나 강계 · 진주 등 색향(色鄕)에 전근되기를 원하는 풍토였다는 바, 이는 미인이 많은 탓이라 한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친정어머니[김제남(金悌男) 부인] 노씨가 제주감영(濟州監營)에 노비로 있었다든가,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3일천하의 주역 김옥균(金玉均)의 부인이 충청감영(忠淸監營)에 관비로 떨어진 (형식상으로 그친 듯) 예가 바로 그것이다.
공천은 매매 · 증여하는 일은 없었으며 보통 백성과 같이 취급받은 것은 노비는 노비지만 공유물이란 생각에서 였던 것 같다. 그들 중 충성되고 성실한 자는 오히려 자금까지 주어 생업을 갖게 해 주었고, 그 자손은 방자[房子(관청의 사환)], 이서(吏胥) 등에 기용해 주기도 하였다.
사천(私賤)은 일반 사가에 소속된 노비로서 대대, 세습의 씨종과, 사정에 의하여 스스로 부자집 종 되기를 원해서 노비가 된 사람이다. 조선시대 경지면적은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는 계속 불어났고, 여기에 가뭄과 수해로 흉년이나 계속되면 가난한 농민들은 하나라도 입을 덜고자 자녀들을 노비로 자진해 보내는 일도 있었고, 빚에 채여 몸으로 때우는 시한부 노비도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한 번 노적(奴籍)에 오르면 그들의 생살여탈권은 상전의 손에 쥐어졌으며 팔아 넘기든 누구에게 선물같이 증여되든 어찌 할 수 없는 인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노비의 소생은 상전의 소유가 되는 바, 이 경우 남자는 내주고 여자만 남겨두는 집이 많았다. 이 여아는 물론 계집종이 되는 것이다.
사천에는 다음과 같이 세종류가 있다.

「① 전래노비(傳來奴婢) : 증조 때부터 대대로 부리고 있는 노비 및 그 처자
② 매득노비(買得奴婢) : 자기 대에 와서 매득하여 부리고 있는 노비
③ 조전노비(祖傳奴婢) : 처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노비」

이 중 조전노비는 전통사회에서 의례 행해온 것으로 이는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 간택(揀擇)에 다리고 온 종이 조모시비(祖母侍婢) 해녀와 그 아우 복녀(福女)며 중모(仲母) 시비 하나흘 다리고 들어왔더니 복년 즉 선친(先親)이 소과(小科)하신 후 증조모겨오셔 특급하오신 사비니…」

여기에서 복녀는 선친이 과거(小科)에 급제했다 하여 증조모가 포상으로 내린 증여비(贈與婢)임을 알 수 있다.[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