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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를 팔고 산다 했는 바, 도대체 그 몸값은 얼마나 되었을까. 그 가격이 가장 떨어질 때가 전란이라 하는데 대개 우마 한 필과 노비 10명과 맞먹었다니 바꿔 말하면 소나 말 한 마리 값의 1/10이 노비값이었다는 것이다. 근세에 와서는 노비들이 상전에게 반항하고 도망치기도 하는 등으로 골치가 아픈 관계로 노비의 매매가 예전같지 않고 다만 여자종만 팔렸다고 한다. 그 가격이 지방에 따라 일정치 않지만 1900년 무렵, 15세 내외의 용모가 아름다운 소녀가 최고 100원 전후, 20세 내외는 값이 반으로 떨어져 50원 전후, 못생긴 여자는 또 그 반액 정도였다는 것이다.[註]
어쨌든 일단 남의 집 사노(私奴)가 되면 생살여탈은 주인의 손에 달리게 되었다. 양민(良民)과는 결혼을 할 수 없고 만일 이 법을 어기고 노(奴)가 양민의 여자와 결혼하면 곤장 80의 벌을 받아야 했으며, 만일 양민이라 속여서 결혼했을 때는 10을 더 얹어 곤장 90을 맞는 중형이 기다리고 있다. 결혼 뿐만이 아니라 사소한 죄도 양민보다 더 가중시켜 상전에게 욕을 하면 범인(凡人)은 태 10인데 교살형을, 가장(家長)을 구타하면 보통사람에게는 태장(笞杖)인데 참살(斬殺)에 처한 것을 보아도 그들에 대한 사회의 차별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사회의 냉대는 노비 본인은 물로 그 자녀에 대해서도 ‘행랑자식’이니 ‘종의 자식’이니 하여 어려서부터 냉대를 받아 점차 자라 가면서 반항심이 생겨 도망가는 일도 허다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규곤의칙(閨坤儀則)’이란 어느 양반가에 전해 내려오는 규훈(閨訓) 책에는 ‘도망간 종을 찾는’비법이 나와 있다. 그 효용성 여부는 여기서 논외에 두지만
「① 도망간 종의 성명을 써 대들보에 거꾸로 붙이고 그 신을 쑥으로 석장을 떠서 뒷간에 매어 단즉 오래지 아니하여 스스로 돌아오고
② 그 종의 머리털을 물레 위에 걸고 돌리면 갈 바를 몰라 돌아온다.」
하였으며 또 도망가려고 하는 종은 다음과 같이 붙잡는 미연의 방지책을 취하였다.
「그의 옷끈 일척 육촌(1尺 6寸)을 시루 속에 바(밧줄)와 한가지로 찌면 도망코자 하는 마음이 스스로 없나니라.」
그러나 상전이나 종이나 모두 인간사회의 일이므로 주인을 잘 만나면 부모자식간 같이 정의가 두텁게 되어 상전이 죽었을 때는 3년상도 입어 주고, 노비가 종신제라 하지만 상전에 따라서는 그 자녀가 12, 13세 정도가 되어 잔심부름을 할 나이가 되면 그 어미를 해방시켜 주는 집도 있었다.
노복을 다스리는 것은 전통사회에서 주부의 치가법(治家法)의 중요한 조목의 하나로 어노복(御奴僕)의 도로서 갈파(喝破)되고 있다. 넉넉한 집에서는 딸을 출가시킬 때 몸종을 딸려보냈는데 많을 때는 유모도 함께 가는 것이 관례였다. 국혼(國婚)의 경우는 유모 하나에 시비(侍婢)를 둘, 모두 3명이나 보냈던 바, 역시 신분이 종이라 궁중에 가서도 이름은 본방나인(本房內人)이라 했지만 일반 궁녀보다 그 진급이 늦었다. 『한중록』에 의하면 세자빈으로 들어갈 때 유모 외에 세명의 몸종을 데리고 갔음을 알 수 있다. (원래 몸종이 두명인 바, 도중에 한명은 교체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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