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비, 문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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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婢)는 그 기능에 따라 또 여러 이름이 있다. 노래나 거문고를 잘 뜯어 집안 사람의 위안을 담당하는 비녀(婢女)는 성비(聲婢)[또는 가비(歌婢), 창가비(唱歌婢)], 문안을 맡은 비는 문안비(問安婢), 장례 때 곡을 하며 따라가는 비는 곡종비(哭從婢), 주로 마루 위에서 살며 몸종노릇을 하는 방비(房婢) 등으로 불리었다.
이율곡(李栗谷)의 모친 사임당 신씨가 졸(卒)하기 며칠 전 성비에게 거문고를 뜯게 하여 들으면서 말없이 눈물지었다는 일화가 율곡이 지은 모부인행장문(母夫人行狀文) 속에 나와 있다. 이를 보면 성비를 데리고 있는 사대부가가 많았던 것 같다.
문안비는 『경도잡지(京都雜志)』권2에도 나와 있는 바, 정월 초하루 아침에 소비(少婢)를 단장시켜 새해 좋은 인사로써 서로 축하했다고 한다.
연산군 때는 종친으로부터 보내오는 문안비가 매일 대궐 안에 모여들어 시장과 다름이 없어서 연신(筵臣)이 왕에게 5일에 한번씩 하자고 했더니 왕이 선조의 예를 들어 윤허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註] 문안비에 대한 논의는 다음 중종대에도 끊이지 않아 마침내 촌수를 제한하자는 논의까지 나왔고[註] 또 그들이 말을 타고 입궁하다가 궁문에서 부딪친 일도 있었다.[註] 비(婢)나 기(妓)의 승마는 궁녀와 더불어 조선말기까지도 남아 있던 유풍이다.
곡종비(哭從婢) 또는 곡비(哭婢)라고 하는 장례행렬에 울면서 따라가는 비녀(婢女)는 보통 관비 중에서 국상(國喪)에 파견하는 것이다. 사가(私家)에서는 자기 상전의 장례에 주인 아가씨를 대신하여 곡을 하며 산에 따라 가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지만 남의 집에 응원으로 동원되는 일은 우리나라에는 없었다. 중국에는 광복 전까지 ‘읍파(泣婆)’라는 직업여인들이 있어 요즈음 장례식에 화환보내는 것과 같이 읍파 몇명 또는 몇십명을 보내는 부조 방법이 있었다, 그리하여 호상(豪喪)의 척도를 ‘곡성이 진동하였다’는 읍파의 수효에 두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