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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중에도 그 상전집 살림규모에 따라 청지기도 있고 행랑아범도 있고 구종(驅從)도 있으며 가마잡이도 있다. 여자종도 마찬가지다. 의 · 식 · 주에 각기 분담부서에 따라 찬비(饌婢)도 있고 시비(侍婢)도 있고 침모(針母)와 식모도 있으며, 빨래 · 물긷기 기타 잡일을 맡은 행낭어멈들도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공주가 하가(下嫁)할 때 노비‘몇 구’를 내린다는 기록과 민영휘가(閔泳徽家)에 갓 시집온 어린 신부에게 7명의 시녀가 딸려 있었다는 증언으로 미루어 조선시대 사가의 노비수는 줄행낭의 수요로 보아 적게는 20명에서 최고 50명 이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각각 그 맡은 바 직분에 따라 안팎으로 움직이게 마련인데 대가집의 경우 아침은 대개 햇살이 퍼지기 전에 노비들이 일어나 바깥마당을 쓰는데, 우선 대문을 좌우로 활짝 열어 놓아 복을 맞이하는 관례를 치루었다.
종의 자녀들의 생활상의 한 장면이 『한중록』에 나타나 있다.
「복녜는 을묘(乙卯) 후 복사(服事)하여 날을 다리고 유시(幼時)에 떠나지 아니하여 놀음놀이 하기와 자못 부리더니[註]」
여기서 ‘을묘’란 1735년(영조 11년), 즉 작자 혜경궁이 태어나던 해로 복녜의 나이는 10세였다. 종의 딸이 주인집 딸의 소꿉장난 상대가 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런 어린이가 자란 후에는 그 집의 소실이 되는 수가 있다. 이런 경우 아이라도 낳아서 작은 마님 대우라도 해 주면 다행이나 그렇지 않을 때는 노리개감으로서 일은 일대로 시키고 절대로 딴 남자에게 시집을 갈 수 없게 하였다. 소생이 있더라도 그 아이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이른바 수모법(隨母法)에 의하여 천첩자식은 천인이 되게 마련이고 호부호형(呼父呼兄)을 못하고 종이 상전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아버지에게 ‘대감마님’ 이복형제들에겐 ‘서방님’ ‘도련님’ ‘아가씨’라 깎듯이 해야 함은 물론 제사 지낼 때는 마루 아래 거적을 깔고 절을 해야 되며 음복을 할 때도 마당에서 상을 받는다. 이런 모순을 지적하여 ‘도대체 천하에 아비 없는 자식이 어디 있느냐’고 식자들 중에 노비해방론을 펴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건만 정약용(丁若鏞)의 사민평등의 견해를 피력한 『목민심서(牧民心書)』중의 한 대목은 정부에 의해 그 부분만 뜯겨 불태워 버려지고 말았다. 『홍길동전』의 인권선언은 이런 가운데서 분출된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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