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의 특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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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전까지도 서울 시민사회에서는 ‘고깃간’사람을 멸시하는 풍조가 농후해 그 인종이 보통사람보다 특색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첫째, 백정은 허여멀겋고 몸집이 실하다는 것이다.(이는 고기를 많이 먹어 영양이 좋아서라는 뜻일 것이다)
둘째, 백정의 자식은 유치가 처음 날 때 웃니부터 난다고 한다.(갈비를 뜯으라고)
셋째, 말씨에 있어서 액센트가 있고 어미(語尾)가 강하고 날카롭다고 한다. (오랜 세월 학대를 받아서 반항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넷째, 백정은 단결력이 강하다고 한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상민 소유의 산림(山林)을 빼앗고 싶으면 몰래 묘를 쓰고 이것을 기화로 약탈하는 예가 적지 않았는데, 백정들 산에 이와 같은 행위를 했을 경우에는 집단으로 몰려와서 도살용의 칼을 가지고 휘둘렀기 때문에 범보다 더 무서운 양반도 백정의 산 만큼은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정도 인간이다. 그 사회에도 의리도 있고 효도 있고, 학대받은 인생으로서의 한도 있다.
백정은 부모의 3년상 동안 도살용의 칼을 씻어 다락 위에 얹어 놓고 그 직업을 쉰다. 그리고 그 상청(喪廳)에는 탕건과 갓, 도포(개화 후는 두루마기)를 새로 만들어 올려놓고 아침, 저녁 상식(上食)을 올린다. 이것은 1910년대 어느 일본 관리의 목격담이다.[註]생전에 제도적 굴레에 묶여 돈이 있어서 해 입고 싶어도 입지 못한 어버이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서이다.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상청(喪廳)에는 비단옷 한 벌과 비녀를 놓는다. 쪽 한번 찔 수 없었던 여원(女怨)을 풀어주기 위해서이다.
백정은 또 자신이 죽을 때 평생 애용해 온 칼을 가져오라 해서 매만져 보며 가슴에 품고 죽는다.[註] 그 칼이야 말로 백정에게는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세인의 멸시 속에 오로지 그것 하나를 가지고 식구들을 거느리며 살아올 수 있었던 고맙고 소중한 물건인 것이다.
고종 31년(1894) 갑오개혁으로 일대 신분변혁이 있게 되자 이들 2세는 전업을 하여 이발소 · 구두짓기에서부터 일본인의 앞잡이라는 빈축을 사면서까지 순경 · 헌병보 등으로 나아갔다. 이들 순경과 헌병보는 지난 날의 피압박에 대한 어떤 보상심리도 다분히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