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정들이 모여 살던 곳은 명륜동의 성균관 언저리였다. 갖바치촌도 얼마 떨어지지 않는 동소문 밖이었음은 재료의 공급과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천인이란 원래 천시당하는 인생들이지만, 무당조차도 양반은 물론 그보다 위의 계급까지 단골대상을 따라 4대문 밖이면 어디나 산재해서 살 수 있었지만 백정과 갖바치만은 달랐던 것이다. 그래도 갖바치는 가죽은 취급하더라도 도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정은 아니었다.
백정이 사회 인습적으로, 또 법률적으로 받는 차별대우는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죄를 범했을 때 보통 사람은 대 위에 엎어놓고 태장이든 곤장이든 맞게 하는데 백정은 그냥 맨 땅 위에서 때린다.
장례 때 동네에서 상계(喪契)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상여의 관리와 사용을 하였으나 이들 백정에게는 1910년대 무렵까지도 상여를 빌려주지 않아 군수가 개입해도 소용이 없어 자기네들이 간략하게 만들어서 쓰는 예가 많았다. 이것으로 볼 때 원래 옛날부터 백정은 죽어서도 상여를 타지 못하고 ‘마주잡이’라 하여 시신을 널판지 위에 놓고 2인이 앞 뒤에서 메고 가는 그런 형식을 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성명에 있어서도 성이 없는 것은 다른 천민들과 마찬가지지만 이름에 인(仁), 덕(德), 의(義) 같은 자는 참월(?越)이라 해서 붙일 수도 없었고 또 내세울 수도 없었다. 백정의 풍속은 애초에 타율적인 제재(制裁)에 묶여 오랜 세월, 그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 ‘인간 이하의 짐승같은 인생’이라 자포(自暴) · 자비(自卑)하면서 살아오는 동안 그것이 굳어버린 것이 백정사회의 풍속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