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新都)의 건설(漢陽奠都) (Ⅰ)
> 문화사적 > 궁궐과 제궁 > 궁궐과 제궁의 총설 > 신도의 건설(Ⅰ)
 

   고려말 공양왕 4년(1392) 7월 17일 무혈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영흥 출신의 무인 이성계(李成桂)가 개경 수창궁에서 국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왕조가 바뀌면 국호를 고치고 도읍을 옮기는 것이 동양사회의 전통적 관례이거니와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자 천도 문제를 거론하여 즉위년 8월 13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교지를 내려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명하고, 이어 15일에는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 이염(李恬)을 한양부에 보내어 궁실(宮室)을 수즙(修葺)케 하였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천도 문제가 이와 같이 조속히 거론된 이유는 개경(開京)은 본래 구왕조(舊王朝)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근거지였으므로 국가의 면목을 일신하고 민심을 수람(收攬)하기 위해서는 우선 수도를 새로이 건설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 천도 문제는 한편으로는 당시 인심을 크게 지배하고 있던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영향된 바도 결코 적지 않았다.
한양은 고려의 문종 · 숙종 이래 남경으로서 풍수지리상으로 비보(裨補)의 요지로서 지목되어 왔을 뿐 아니라 고려말 우왕 · 공양왕대에는 한때 천도의 후보지로서 결정된 일도 있었던 곳이었으므로 태조는 한양을 새 도읍으로 선택한 것 같다.
그러나 한양 궁실의 수즙이 추운 날씨로 인하여 한동안 중지되고 있던 사이에, 왕명으로 왕실안태(王室安胎)의 터를 찾아 양광 · 경상 · 전라도 각지를 순력(巡歷)중이던 정당문학 권중화(權仲和)가 태조 2년(1393) 정월에 신도의 후보지로 전라도 진동현(현 珍山)과 양광도 공주 계룡산을 추천한 일이 있었다. 이에 태조는 큰 관심을 갖게 되어 계룡산을 5일 동안 실지 답사하고 산수의 형세를 심사한 결과 이 곳을 신도로 삼을 결심을 하여 수도 건설의 역사를 진행시키기까지 하였는데, 그 해 12월에 당시 풍수지리의 권위자였던 경기좌우도 도관찰사 하륜(河崙)의 반대로 인하여 공사가 중지되었다. 그 이유는 계룡산의 위치가 남쪽에 편재하여 동북 서북방과 너무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풍수상으로도 계룡산의 지형이 산(山)은 건(乾, 동북)방에서 오고 수(水)는 손(巽, 동남)방으로 흘러 중국 송조(宋朝)의 풍수가 호순신(胡舜臣)의 이른바 ‘수파장생 쇠패입지(水破長生 衰敗立至)’의 불길한 땅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즉 길흉정방(吉凶定方)에 있어서 물은 길방에서 와서 흉방으로 흘러가야 길복(吉福)의 지가 되는 법인데, 계룡산의 경우는 반대로 흉방에서 와서 길방으로 흘러가니 흉화(凶禍)를 초래하는 땅이라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태조는 고려시대 이래 서운관(書雲觀)에서 소장해 오던 비록(秘錄)을 거의 다 하륜에게 주고 새 도읍지를 선택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하륜은 신도(新都)의 후보지로 한양 무악(鞍山) 서남방인 현 신촌동 · 연희동 일대를 지목하여 아뢰었는데, 태조는 3년(1394) 2월에 좌시중 조준(趙浚) 등으로 하여금 현지를 답사케 한 결과 하륜을 제외한 대다수의 신하들이 적당치 못하다고 반대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그 해 7월 다시 음양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을 두고 권중화(權仲和) · 정도전(鄭道傳) · 성석린(成石璘) · 남은(南誾) · 정총(鄭摠) · 하륜(河崙) 등 중신들을 총동원하여 후보지를 고르게 하는 한편, 8월에는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친히 무악 현지를 두루 살펴보았으나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해 무악천도론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태조는 귀로(歸路)에 지금 서울 땅으로 들어서 고려 남경의 구궁기지(舊宮基地)를 살펴보고 산세를 관망하면서 지사(地師) 윤신달(尹莘達) 등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국내에서는 개경을 상지(上地)로 하고 이 곳을 그 다음으로 치지만 건(乾, 서북)방이 낮고 수천(水泉)이 고학(枯)하여 있다.」

고 대답하였다. 태조는 만족하여 다시 왕사 무학[無學, 자초(自超)]에게 물었던 바 대답하기를,

「이 곳은 사면이 고수(高秀)하고 중앙이 평탄하여 도읍으로 삼기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지만 여러 사람의 의견에 쫓아서 결정함이 좋겠다.」

는 신중론을 진언하자, 하륜을 제외하고는 모든 신하들도 ‘반드시 천도를 할 바에는 이 곳이 가장 적합하겠다’고 하였다.
태조 일행이 개경으로 돌아온 직후 좌정승 조준(趙浚) · 우정승 김사형(金士衡) 등이 상소하여 한양을 신도로 확정하기를 정식으로 주청하였으므로 마침내 태조는 단안을 내려 9월 1일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9월 9일에는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권중화(權仲和) ·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김주(金湊) · 좌복야(左僕射) 남은(南誾) · 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 이직(李稷) 등 중신들을 한양에 보내어 종묘 · 사직 · 궁궐 · 조시(朝市)와 도로의 기지를 정하게 하니, 이들은 지금 경복궁과 종묘의 기지를 살펴보고 이를 제도(製圖)하여 태조에게 바쳤다.
이와 같이 신도의 윤곽이 드러나자 곧 이어 청성백 심덕부 · 참찬문하부사 김주를 한양에 머물게 하여 신도경영(新都經營)을 감독케 하는 동시에 모든 신하들을 한자리에 모아 천도의 시기를 상의하였는데, 모두 연내(年內)가 좋겠다고 하므로 드디어 10월 25일에 분도평의사사(分都評議使司)와 각 사(司) 2명씩을 개경에 남겨둔 채 조정 백관을 거느리고 천도하니 때는 바로 태조 3년(1394) 10월 28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