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新都)의 건설(漢陽奠都)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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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 3년의 한양천도와 함께 궁궐의 조성, 도성의 수축 등 그 시설이 차례로 완성되어 서울이 새 수도로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되어가고 있을 무렵 ‘무인지란(戊寅之亂)’ 또는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왕실 내부의 일대 변란이 일어났다.
이 제1차 왕자의 난은 태조 7년(1398) 8월에 전비(前妃) 한씨 소생인 정안군 방원(芳遠)이 건저(建儲) 문제에 불만을 품고 이숙번(李叔蕃) 등 자기의 사병(私兵)을 동원하여 반대세력인 세자 방석(芳碩)과 정도전 · 남은 등을 제거한 사건이었다. 이에 태조는 골육상잔에 실망한 나머지 9월에 왕위를 새로운 세자에게 물려주니 이가 곧 정종(定宗)이다.
이 사건 이후 한양에 불길한 징조가 잇달아 일어나 인심이 흉흉해지자 서운관(書雲觀)에서는 이를 이유로 글을 올려 피방(避方)하기를 주청하였다. 이에 정종 즉위년(1399) 2월에 종친과 공신들을 모아 어가(御駕)를 옮기는 문제에 관하여 가부를 물었는데, 모두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이 적합하다 하므로 3월 7일에 구도(舊都)에의 환도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개경 환도 이후 1년도 채 못되어 개경에서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상왕인 태조의 윤허를 얻어 당시의 실력자 정안군 방원을 세자로 삼고 곧 이어 동년 11월에 왕위를 그에게 전하여 주었으니 이가 곧 3대 태종이다.
태종이 즉위한 다음 달인 12월 20일에 개경의 본궐인 수창궁(壽昌宮)에 화재가 일어나 타버리자 이를 계기로 다시 천도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 이후 얼마 간 천도론은 보류 상태에 있었으나 태종 2년(1402) 7월에 왕이 하륜 · 김사형 등 문무 대신들을 모아 또다시 한양천도의 가부를 토의케 하였더니 신하들의 의견은 구도개경론(舊都開京論) · 신도한양론(新都漢陽論) · 무악이도론(毋嶽移都論)의 3가지로 갈라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견이 개경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자 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으므로 천도 문제는 다시 보류되고 말았다.
그 뒤 태종 4년(1404) 9월에 태상왕(태조)이 천도 문제에 적극적인 열의를 보이자 태종도 한양천도를 결심하고, 처음 신도이궁조성도감(新都離宮造成都監)을 두었다가 이어 궁궐수보도감으로 개칭하여 재천도를 적극적으로 서두르게 되었다. 이 때 하륜이 또다시 무악 천도를 주장하였으므로 태종도 이에 동조하여 무악 일대를 친히 살펴보기도 하였으나 중신들의 반대에 봉착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후 태종은 개경 · 한양 · 무악 등 세 후보지를 놓고 가부의 선택을 하기 위하여 종묘에서 군신들과 더불어 척전 (擲錢)으로 길흉을 점쳤던 바 신도가 이길일흉(二吉一凶)이 있고, 개경 · 무악이 이흉일길이라는 결과가 나왔으므로 왕은 한양재천도의 최종적 결정을 내려 태종 5년(1405) 10월 8일에 개경을 출발하여 11일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리하여 그 며칠 뒤인 20일에 왕이 창덕궁에 입어(入御)함으로써 여러 해를 두고 논의가 분분했던 천도 문제는 완전히 결말을 보게 되어 그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울은 정치 · 경제 · 문화 · 교육 · 기타 모든 분야의 중심지가 되어 우리나라의 심장부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