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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궁은 태종이 즉위하여 한양천도 문제가 거론되면서부터 건립하기 시작한 이궁(離宮)으로 출발하였다. 이궁인 창덕궁은 태종 4년 10월 6일 왕명에 의하여 영건(營建)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공역은 이궁조성도감제조(離宮造成都監提調) 이직(李稷) 등의 설계와 감독으로 진행되었다.
이미 태조가 건립한 경복궁(景福宮)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이궁을 신축한 이유는 역시 풍수지리설의 견지에서 본궁에 대한 피방(避方)의 처소가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피방이란 흉을 피하여 길의 방향으로 잠시 자리를 옮긴다는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관념이다.
건설중인 창덕궁의 역사(役事)를 돌아보고 준공도 되기 전에 이궁의 정전에서 청정(聽政)을 하기도 하였다. 이 궁이 준공된 것은 공사를 명한 지 만 1년이 지난 태종 5년 10월이었다.
개경으로부터 한양으로 천도한 지 10일 후인 10월 20일에 왕이 새로 단장된 신궁에 입어(入御)하게 되었으니 이 날은 바로 환도와 신궁의 낙성 축하가 서로 겹치는 격이 되어 한양성내의 시민들은 경축의 기분으로 온통 충만되어 있었다.
정문은 돈화문(敦化門)으로 여기서 다시 인정문(仁政門)을 거치면 수조정전(受朝正殿)인 인정전(仁政殿)에 당도하는데, 효종 · 현종 · 숙종 · 영조 · 순조 · 철종 · 고종이 이 곳에서 즉위하였다. 동쪽의 편전인 선정전(宣政殿)을 비롯하여 수십 채의 전각 · 누정 등 건축물이 궐내에 산재해 있었고, 그 중의 대조전(大造殿)은 왕비가 거처하는 정당(政堂)으로서 역대 국왕 중 여기서 탄생하고 승하한 왕이 많았다.
창덕궁의 후원 약 62,000평이 지금의 이른바 비원(秘苑)으로 경복궁의 남성적 장려함에 비하여 창덕궁은 여성적인 섬세함을 자랑하고 있다. 창덕궁은 후원을 합하여 약 15만여 평으로 면적은 경복궁보다 넓으나 그 궁궐의 규모는 경복궁에 비할 수는 없었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에 화재를 입었으나 광해군초에 다시 중수되었다. 그 뒤로도 대소의 화재가 여러 번 일어났지만 그 때마다 곧 중수, 개축되어 전각의 수에는 증손(增損)이 심한 편이었다. 창덕궁은 고종이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하기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정궁으로 사용되어 국왕이 상주한 기간이 가장 길었던 궁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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