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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궁의 창건은 광해군의 풍수길흉설의 신봉과 깊은 관계가 있다. 광해군 7년(1615) 4월 왕이 경운궁(慶運宮)에서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한 이후 창경궁(昌慶宮)의 중건 공역(工役)이 진행되고 있는 도중에 풍수승(風水僧) 성지(性智)와 중국인 풍수가 시문용(施文用) 등에 의하여 인왕산 왕기설(王氣說)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광해군은 이 인왕산 왕기를 누르기 위해 왕 8년(1616) 인왕산 기슭의 민가를 헐고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궁의 건설은 중수가 아니라 새로 영건하는 것이었으므로 많은 인력과 재력이 소모되었고, 또 광해군 9년에는 경덕궁의 영조(營造)가 동시에 병행된 관계로 여러 가지 재정적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이러는 가운데서도 왕은 공사의 계속을 강행하였으나 광해군 15년 3월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공사는 일단 중단된 듯하다.
일설에 의하면 인조가 즉위한 이후 인경궁은 파괴되었다는 말도 있으나, 인조 10년 6월에 인목대비가 인경궁 흠명전(欽明殿)에서 서거하였다는 사실과 인조 26년 3월에는 인경궁의 재와(材瓦)를 헐어다 홍제원(弘濟院)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면, 인조반정 후에도 어느 시기까지는 인경궁이 존속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그 구기(舊基)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인경궁은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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