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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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 서울 북악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정궁으로 태조 3년(1394) 12월 3일 개기제(開基祭)를 지낸 후 다음해인 태조 4년(1395) 9월 25일 준공을 보게 되었다. 궁궐의 영건은 왕권을 중심으로 하던 국가로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특히 국왕이 거처하며 모든 정사를 관장하던 곳이었으므로 국가와 왕실의 존엄이 궁궐의 외관과 내용에 달려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당시의 여건으로 태조는 새 도읍지의 선정과 궁궐 기지의 선택에 적지 않은 심혈을 기울였던 것 같다. 따라서 태조 3년(1394) 8월, 태조는 친히 여러 중신들을 거느리고 서울에 와서 도읍지의 적합 여부의 결정을 직접 했고, 개경으로 돌아가서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임시 기구를 설치, 심덕부(沈德符) · 김주(金湊) · 이염(李恬) · 이직(李稷) 등으로 하여금 궁궐 조성의 임무를 맡게 하였다. 또한 뒤 이어서 한양으로 권중화(權仲和) · 정도전(鄭道傳) · 심덕부 · 김주 · 남은(南誾) · 이직 등을 보내 궁궐 및 종묘 · 사직 · 시전 · 도로의 기지를 정하게 하였고 동년 9월 9일에는 권중화 등이 궁궐과 종묘의 설계도서를 작성하여 개경으로 돌아갔다.
이 때 권중화 등이 결정한 궁궐기지(宮闕基地)에 대한 실록의 기사를 보면

「전조(前朝) 숙왕(고려 숙종 1096∼1105) 때 영건하였던 궁궐지가 협애(狹隘)하므로 다시 그 남쪽을 찾아 보았는데 해산(亥山)을 주산으로 하여 임좌병향(壬坐丙向)이며 평연하고 광활하며 군룡이 조읍(朝揖)하니 면세(面勢)가 잘 되었다.」

고 하였다. 이는 고려 숙종 때의 남경이궁(南京離宮) 즉 연흥전(延興殿) 등 옛 궁전이 있던 곳이 좁아 그 남쪽으로 나와 해산 즉 서북방 산인 백악(白岳)을 주산으로 하고 북좌남향(北坐南向)으로 정하니 국면이 평탄하고 넓으며 전방의 여러 산이 모두 앞에서 조회(朝會)하며 읍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동년 10월 25일, 한양에 도읍지를 정하고 종묘 · 궁궐은 위치만을 정한 채 개경을 떠난 왕실과 조정 중신들은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하여 한양부 객사를 이궁으로 삼아 정무를 집행하였고, 11월 3일에는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하여 영건공작(營建工作) 등의 일을 맡게 하였고 12월 3일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과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김입견(金立堅)으로 하여금 종묘와 궁궐의 기공을 황천(皇天) 후토(后土)와 산천 제신(諸神)에게 제사드려 고하게 하고 4일에는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권근(權近)으로 하여금 궁궐 지을 곳에 나가 개기제(開基祭)를 거행하게 하고 제산(諸山) 승도(僧徒)들을 모집하여 공역을 시작하게 하였다.
이 때 동원된 인력은 주로 여러 산사(山寺)의 승도들이었고 도중에 제도(諸道) 정부(丁夫)를 징집 부역하게 하였으나 농기(農期)에는 다시 이들을 돌려 보내고 승도들만이 궁역(宮役)을 담당케 하였다. 이 때 산사의 승도들이 주로 궁역을 담당하였던 이유로는 고려조 숭불사상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승적(僧籍)에 들어 있었는데 이중 많은 승도들이 수도나 설법보다는 재회(齋會) · 상사(喪事) 등에 따라 다니며 의식(衣食)을 구하는 일이 많았고 공사 공역에 부역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어 건설공사 등에도 익숙하여 이들을 공사에 동원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편리하였던 것이다.
태조 4년(1395) 8월에는 경기좌도(京畿左道)의 인부 4,500, 우도(右道) 인부 5,000,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집하여 궁궐 건축공사를 급진전시켜 동년 9월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 때 건립된 내외전은 정전을 위시하여 연침 (燕寢) · 보평청(報平廳) · 전문(殿門) · 오문(午門) · 각종 회랑 (廻廊) · 누각(樓閣) · 주방(廚房) · 중추원(中樞院) · 삼군부(三軍府) 등 총 390여 칸에 이르렀다.
동년(1395) 12월에는 왕실과 조정 대신들이 한양객사 건물에서 북악산 아래에 새로 지은 궁궐로 옮겨 신도에서의 새로운 면모와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궁성 수축은 궁궐이 낙성된 2년 후인 태조 6년(1397) 겨울부터 있었던 것같다. 실록에 의하면 태조 7년(1398) 1월, 궁성 감독관에게 왕이 술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며 왕이 남문으로 나가 궁성기지(宮城基地)를 순시하였다는 기사(記事), 그리고 2월에는 내상절제사(內箱節制使) 순녕군(順寧君) 이지(李枝) ·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천우(李天祐) 등에게 명하여 갑사(甲士)를 거느리고 궁성 공역을 감독하게 하였으며 왕이 자주 궁성을 순시하는 등 공역에 박차를 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같은 해 6월에는 중추원사 이지로 하여금 궁성 남문을 감독하게 하고, 7월에는 경기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케 하였다. 그러나 궁성 수축은 동년 8월 ‘왕자의 난’을 당하게 되어 공사가 일단 중지되었다. 그 후 정종 원년(1399) 1월에 다시 궁성 역사가 있었음을 실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개경 이도(移都) · 남경 환도의 논의가 있은 후 태종 4년(1404) 10월 다시 한경(漢京) 환도의 확정을 보고 이궁인 창덕궁(昌德宮)을 건설케 하여 1405년 10월 개경으로부터 한경(漢京) 창덕궁에 입어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부왕 태조가 세운 경복궁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어 1406년 지신사(知申事) 황희(黃喜)와 국정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경복궁은 부왕이 영건(營建)한 곳으로서 굉장(宏壯) · 거여(巨麗)한데 버려두고 거처하지 않으니 매우 불가하다. 좌우의 낭(廊)을 수리하라.」

고 하여 그간 황폐되었던 건물을 수리하여 사용토록 하였다. 근정전(勤政殿)의 서랑(西廊)을 사고(史庫)로, 궁궐의 낭무(廊)들은 군자미(軍資米) 등의 저장 창고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태종 11년(1411) 5월에는

「경복궁은 태조 창업 초기에 세운 것이니 명나라 사신이 오면 반드시 여기서 영접하여야겠다. 근래 유사(有司)가 불유의(不留意)하여 수즙(修葺)하지 않는데 지금부터는 수시로 수치(修治)케 하라.」

고 명하였다.
이후 경복궁은 수시로 수리케 되었으며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데에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411년 9월 풍수가들이 말하는 ‘명당수(明堂水)’를 궁궐 서쪽 모퉁이에 파고 이를 금천으로 끌어들이고 주위 환경도 아름답게 수장(修裝)하였고, 1412년 여름에는 경회루(慶會樓)를 다시 지어 외국 사신과 조정 관원들의 연회 장소로 이용하였다. 원래 경회루 위치에는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지대가 습윤하여 건물이 많이 상하고 위태롭게 되었다. 이 사실을 경복궁 제거사(提擧司)가 보고한 바 태종이 친히 나가 보고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 등에 명하여 개수하게 하였다. 박자청은 원래 위치에서 조금 서쪽으로 터를 넓히고 규모도 크게 하였다. 그리고 지대의 습윤함을 고려하여 주위에 못을 파고 못에는 고기를 놓아 길렀다.
경회루의 공역은 1412년 3월, 4월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4월 11일 왕이 친히 현장에 나가 제조(提調) 박자청(朴子靑), 역도대장(役度隊長) 대부(隊副) 등 6백여 명에게 술을 하사하였다고 기록되고 있어 경회루 공역에 대한 국가의 성의가 어느 정도이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경회루는 1412년 4월 26일 준공되고 5월에는 왕이 친히 경회(慶會) · 납량(納凉) · 승운(乘雲) · 과학(跨鶴) · 소선(召仙) · 척진(滌塵) · 기룡(騎龍) 등 여러 명칭을 생각하여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 하륜(河崙)과 의논하여 ‘경회’로 결정하였고, 하륜에게 기문(記文)을 짓게 하고 양녕대군으로 하여금 현판(懸板)을 쓰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