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중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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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의 중건이 논의된 것은 고종 2년 4월 대왕대비(조대비)에 의해 발의된 중건교서(重建敎書)에서부터였다. 조대비의 교서에는 경복궁은 정도(定都)와 함께 왕궁이었고 규모 및 외관이 웅대장려하고 정령(政令)이 바르게 시행되던 곳인데 불행하게도 병화(兵火)에 소실되어 아직도 중건하지 못하였음은 지사(志士)들의 차탄(嗟歎)을 불금(不禁)하게 한 일이고 익조(翼祖, 익종) 및 헌종이 중건의 뜻을 갖고 있었으나 그 유지가 이루어지지 않아 지금까지 숙원으로 남아 있고, 궁궐의 중건은 조종(祖宗)의 뜻을 계승하는 일일 뿐 아니라 백성의 복과 나라의 영원한 근본이 실로 여기에 있고 궁을 중건하여 중흥대업을 이룩하려 대신들과 의논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위의 조대비의 전교는 왕의 친부(親父)로 정무를 담당 수행하던 흥선대원군의 영향이 컸다. 즉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기까지 궁중 최고의 지위에 있던 익종왕비 조씨와 흥선군과의 긴밀한 연락과 고종 즉위 후 조대비의 수렴청정 뒤에는 실권을 가진 대원군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경복궁의 공역이 시작된 것은 고종 2년(1865) 4월 13일의 일이었다. 고종은 하루 전날 궁전 구기로 친심(親審)하였고, 13일 인시(寅時)를 기하여 기공하였는데 공사는 먼저 황폐한 궁전 기지를 정리하는 일이었고 우선 구기를 따라 궁성을 쌓았으며 이어서 성문과 내전을 건축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인부는 우선 도성 안 사람과 근기(近畿)의 농민들이 자진 부역의 명목으로 동원되었다.
중건공사는 궁성축조 · 내전건축에 이어 외전(外殿) · 경회루 · 별전(別殿) · 행각(行閣)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4∼5월에는 기지(基地) 정돈 및 석재 · 목재 등의 반입 및 치련(治鍊)에 주력하였다. 6월 20일 궁성의 수축과 교태전(交泰殿)의 정초가 있으면서부터 공사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신무문이 1865년 9월 22일, 광화문 · 인지당(麟趾堂) · 교태전 · 강녕전(康寧殿) · 연생전(延生殿) · 경성전(慶成殿) 등이 10월 11일, 함원전(含元殿) 11월 16일, 영추문(迎秋門) 10월 25일, 천추전(千秋殿) 12월 9일, 자미당(紫薇堂) 12월 15일, 건춘문(建春門) · 소동문(小東門)이 12월 25일 상량(上樑)되었다. 한편 1866년 2월에 만춘전(萬春殿)의 입주(立柱) 상량이 있었고 6월에는 정전인 근정전(勤政殿) 및 사정전(思政殿)의 영건을 위한 개기 축대공사가 있었다. 8월에 정초가 있었으며 상량은 1867년 봄으로 미루었다. 고종 4년(1867) 중건공사는 활기를 되찾아 근정전 · 사정전 외에 근정문(勤政門) · 홍례문(弘禮門)이 1월 19일, 경회루(慶會樓) 4월 20일, 자선당(資善堂) 6월 28일, 수정전(修政殿)이 6월 29일, 선원전(璿源殿)이 12월 7일 각각 상량되었다.
중건공사가 진행되는 3년여 기간 중에 국내 정세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았다. 즉 인부의 조달, 자재의 공급, 국고의 탕진, 물가의 앙등 등이 공사에 큰 지장을 주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천주교에 대한 금교(禁敎) 대처형사건, 미국선(美國船) 및 불함(佛艦)의 침입 등도 어려운 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공역의 진행을 주도하고 지휘하던 흥선대원군은 그 특유의 과단성과 능란한 정치수완으로 공사를 끝까지 밀고 나가 기공 후 3년 만인 고종 4년(1867) 겨울까지 중건의 주요 공사는 완공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공사는 내외전의 본건물은 물론이려니와 부속 건물인 누각(樓閣) ·행각(회랑(廻廊)行閣) · 문(門)들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마침내 1867년 11월 16일에는 고종이 대왕대비(조대비), 왕대비(헌종비), 대비(철종비), 왕비와 함께 친히 경복궁에 나가 신축 낙성된 정전인 근정전에서 백관(百官)의 조하(朝賀)를 받고 영건도감의 도제조 이하 관계 관원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국경(國慶)의 예에 준하여 전국에 대사령을 반포하였다.
그러나 궁궐내의 일부공사가 진행중에 있어 왕실의 이어(移御)와 조정의 시무(視務)에는 부합한 점이 많아 다음해인 고종 5년(1868) 공역을 완성하고 이거(移居)키로 하였으나 이듬해 봄에는 다시 미국 함정의 연안침입사건이 있고 공사도 지연되어 4월에 다시 전교를 내리어 공사진행을 독려하여 6월말 예정된 공사를 마치었고 7월 2일 국왕과 왕실의 경복궁 이어가 실현되고 정무(政務)도 개시하게 되었다. 이로써 공사 기공 후 3년 4개월 만에 신궁이어(新宮移御)가 성취된 것이었다. 준공의 성사와 함께 영건도감의 도제조 김병학(金炳學), 제조 이최응(李最應) 이하 여러 관계 관원들을 포상하고 일찍이 태조 때 경복궁 창건에 공로가 컸던 정도전 · 남은 · 이직 · 심덕부 등에 대하여는 지방 관원들에 명하여 그들 묘소에 제사 드리게 하였다. 또 7월 8일에는 왕이 근정전에 친임하여 경축하는 과거를 보이기도 하였다.
국왕 및 왕실이 친궁으로 이어(移御)한 후에도 영건도감은 그대로 남아서 미진했던 공사를 계속하였으며 융무당(隆武堂) · 융문당(隆文堂) · 비천당(丕闡堂) 등은 1868년 9월, 10월 그리고 1869년 7월에 각각 상량하였다.
경복궁 중건이 대체적으로 준공되고 이어한 후에도 궁내의 공역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고종 10년(1873)에는 궁성 안 북쪽에 건청궁(乾淸宮)이 지어졌는데 이 곳은 북쪽에 치우쳐 대신들도 모르게 내탕금으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건청궁의 공사를 나중에 안 부호군 강진규(姜晋珪8, 좌의정 강노(姜?) 등이 궁 중건 후 다시 불급(不急) 화려의 영건을 함은 불가하다고 진언하였지만 이 공사는 대원군의 과감한 조치로 계속 진행되어 장안당 · 옥호루 · 곤녕각 · 면금당 · 복수당 등 여러 건물들이 이루어졌다.
또한 1873년 12월에 자경전이 화재로 소실되어 1874년 자경전 중건공사 및 이 공사와 병행하여 전무(殿), 회랑(廻廊)의 기능이 불편했던 교태전 등 건물을 재건하기로 하였다. 1876년 4월에는 자경전을 비롯하여 교태전 · 자미당 · 인지당 등의 건물이 중건, 개건되었다.
그러나 1876년 11월 다시 큰불이 일어나 교태전 · 강녕전 · 함원전 · 자경전 · 인지당 · 건순각 · 자미당 · 덕선당 · 협경당 · 복안당 · 순희당 · 연생당 · 흠경각 · 홍월각 등 내전 일곽(一廓)의 전각 모두가 소실되었다.
한편 궁중의 재변이 잇달아 일어나므로 왕실과 조정은 임시로 창덕궁으로 옮기고 소실된 궁궐의 중건을 기다려 환어(還御)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내외의 정세가 궁궐중건의 여건에 미치지 못하여 중건을 못하고 그대로 방치되어 오던 중 고종 19년(1882)의 임오군란, 21년(1884)의 갑신정변이 일어나 내외 군인들의 발길이 궁중에 미치고 국왕과 왕비가 환난을 잇달아 겪게 되어 1885년 1월 왕은 다시 창덕궁을 떠나 경복궁으로 환어하게 되었다. 왕이 환어한 후 중건소(重建所)를 설치하여 목재, 석재 등 자재를 준비하고 1888년 봄부터 영건공사를 착수하였다. 4월에 교태전 · 강녕전 · 인지당 · 자미당의 상량문 제술관(製述官), 현판 서사관(書寫官)이 임명되고 자경전 · 함원전 · 경성전 · 연생당 · 흠경각의 정초가 있었고, 7월에는 전교(傳敎)로 모든 사가(私家)의 토목일을 금단하고 궁전 공역에 총력을 기울이게 하여 회신되었던 경복궁 내전은 다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또 고종 30년(1893)에는 신무문 밖에 경농재(慶農齋)와 대유헌(大有軒)을 지어 농사일을 중히 여기고 풍년을 기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