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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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고종은 1896년 1월 세자와 함께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겨 거처하게 되었다. 이는 1894년부터의 일본 군대의 궁성 난입과 1895년 8월의 왕에 대한 위협 및 민비 시해 참변 때문이었다. 결국 경복궁은 왕의 덕수궁 이어(移御)로 중건 후 30년에 왕궁 아닌 폐궁으로 변하였으며 1910년 이후에는 일제가 궁내의 많은 건물을 마구 헐고 방매(放賣)하기까지 하였다. 그 일례로는 건춘문 안에 있던 정현각(正顯閣)이 장충동의 남산장(南山莊) 별장으로 옮겨지고 그밖에도 많은 건물들이 일본인들의 요리점이나 사찰로 탈바꿈하였고 남산동 · 필동 · 용산 등지의 일본인 주택으로 옮겨졌다.
또한 1915년 가을에는 일제의 이른바 시정 5주년기념사업(施政五周年記念事業)으로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하여 궁궐은 유린되고 그 면모는 궁궐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근정전을 비롯한 교태전, 경회루까지도 일제에 이용당하고 궁궐내의 넓은 땅을 사용키 위해 많은 건물들을 철거하고 5,200여 평에 달하는 진열관을 새로 짓고 그 정원에는 고대 유물인 각종 석탑 · 부도 (浮屠) · 불상 등을 각지에서 옮겨 일제의 마음대로 배열하였으며 음악당까지 설치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공진회(共進會)를 근정전 · 교태전 등에서 개회하고 귀빈실로 이용하였다.
특히 망국의 서러움을 되새기게 한 일은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의 공진회 회기 중 개막식이 근정전에서 이루어졌고 이 때 총독 데라우찌(寺內正毅)는 오만방자하게 전내(殿內) 용상(龍床)에 앉아 경과 보고와 개회사를 하였다는 사실이다.
1918년부터는 근정전 · 사정전 · 만춘전 · 천추전까지 고적 · 유물의 전시를 위한 진열실로 사용되었고 이보다 앞서 1916년부터는 조선총독부 청사 건축공사가 경내에서 기공되어 궁궐 전면에 남아 있던 모든 건물들, 즉 홍례문과 그 좌우의 회랑 (廻廊) · 유화문(維和門) · 용성문(用成門) · 협생문(協生門)들이 헐리고 금천교(禁川橋)도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인 조선총독부 청사는 1926년 낙성하여 왕궁을 압도하게 하였고 1927년 9월 15일에는 왕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 조선조 정궁인 경복궁은 완전히 맥이 끊기게 되었다.
또한 총독부청사가 공사중이었던 1917년 11월에 창덕궁에 큰불이 일어나 대조전을 비롯하여 흥복헌 · 통명문 · 양심각 · 장순문 · 희정당 · 찬대당 · 내전창고 · 경동각 · 징광루 · 옥화당 · 정묵당 · 요화문 · 요휘문 · 함광문 등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 이의 중건을 위해 이왕직(李王職)과 총독부 간에 경복궁 안의 교태전 · 강녕전 · 경성전 · 연생전 · 만경전 · 흥복전 · 함원전 · 연길당 · 응지당 · 흠경각 등 여러 전각을 헐어 창덕궁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경복궁의 이들 건물들이 창덕궁으로 옮겨져 중건되었다.
1929년 5월에는 신무문 북쪽에 있던 융무당 · 융문당 등이 헐려 한강로의 용광사(龍光寺) 건물로 변하고 1932년 10월에는 건춘문 서북쪽에 있던 선원전(璿源殿)을 헐어 장충동의 박문사(博文寺)로 짓는 등 일제는 불법적이고 있을 수 없는 만행을 끊이지 않고 계속하였다. 이렇듯 일제는 경복궁 안의 4,000여 칸 건물들을 방매하거나 철거하였으며 현재 남아 있는 동십자각의 반대쪽 서십자각도 헐고 1935년부터는 봄철에 궁성내를 일반에게 공개하여 조선왕조 500년 왕궁의 존엄성을 말살하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