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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 · 취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를 한경에 이궁(離宮) 조성의 제조(提調)로 삼았다.[註]」
라 하여 이궁을 조성하기 위한 제조, 즉 조영(造營) 책임자를 정하였다고 하였으며 같은 달에
「한경(漢京)에 이궁(離宮)을 지을 자리를 상지(相地)하도록 명하고, 유한우(劉旱雨) · 윤신달(尹莘達) · 이양달(李陽達)을 보내어 상지하였다.[註]」
라 하여 이궁의 터를 잡게 하였다고 한다. 이 때 중신 중에는 궁궐 신창(新創)에 대한 반대 의견이 있었으며 성석린(成石璘) · 조준(趙浚) 등은 이미 한양에 신궁(新宮, 경복궁)이 있으므로 따로 궁궐을 조영하는 것이 불필요함을 지적하였다. 결국 이를 받아들인 왕은 ‘신도이궁조성도감(新都離宮造成都監)’을 ‘궁궐수보도감(宮闕修補都監)’으로 고치도록 하였으나[註], 그 다음 달인 10월에 들어와서는 이궁을 향교동(鄕校洞), 지금 창덕궁터에 지을 것을 명하였다.
이궁 조성의 공사는 태종 4년 10월부터 시작되어 이직 등이 이궁조성도감제조가 되었다. 공사 도중에는 몇 차례 역군들을 풀어 주었다는 기사가 실록에 보이는데 동년 12월에는 ‘방한경이궁조성군(放漢京離宮造成軍)’이라 하였고 이듬해 태종 5년 3월에는 사헌부가 상서하기를 농사짓는 기간 중에는 이궁 짓는 일을 정지할 것을 건의하여 목수와 외방승도(外方僧徒)까지 모두 돌려보내었다 하며 그 해 4월에는 이궁 조성 군인을 돌려보내고 우봉 · 토산 · 영평 · 철원 · 안협 · 삭녕 등지의 선군(船軍)에게 3개월 급료를 주도록 하였다고 한다.[註] 한편 왕은 여러 차례 공사장에 나와 주연(酒宴)으로 종사자들을 위로하였는데 태종 5년 2월의 실록에는
「이궁(離宮)을 짓는 것을 보고 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과 함께 그 규모를 획정하였다. 종친(宗親) · 근신(近臣)과 더불어 술자리를 베풀고 극진히 즐기었다.[註]」
이라 하여 왕이 제조와 공사 규모를 의논하고 종친 근신들과 주연을 베풀었다고 하였다.
창건된 창덕궁의 전각에 대하여 실록에 그 규모가 적혀 있는데 크게 외전(外殿)과 내전(內殿)으로 구성되고 외전 74칸, 내전 118칸으로 되었다고 하였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창건된 창덕궁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외전의 정전과 편전(便殿)이 불과 3칸 밖에 안된다는 것은 납득키 어려우며 정전 앞의 월대(月臺)의 크기가 동서 63척, 남북 33척인 점과 비교하여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아마도 정전 · 편전의 3칸은 정면의 칸수(間數)를 나타낸 것이며 면적을 나타낸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창덕궁에 누침실(樓寢室)을 구축하고 또한 진선문(進善門)밖에 석교를 만들었는데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이 공역을 맡았다.[註]」
「진선문(進善門) 남쪽에 누문(樓門) 5칸을 세우고 돈화(敦化)라고 이름하였다.」
고 하였다. 이 문은 바로 창덕궁의 정문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 때에 이르러 궁의 정문이 세워져 어느 정도의 궁성의 규모가 정하여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은 준공된 지 10여 년 만인 태종 18년에 ‘개영(改營)’하였는데 그 공사는 세종 즉위년에 끝났다.
그 후 세종대에서 연산군대까지는 인정전이 개영되고 수문당(修文堂)과 대조전(大造殿)의 중수가 있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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