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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처음은 수보(修補)라고 말하였으나 일초일주(一礎一柱)를 모두 개(改)하고 인정전은 완고(完固)하여 잉구(仍舊)하여도 좋은데 진철(盡撤)하여 개(改)하니 말이 수보이지 모두 신작(新作)입니다.[註]」
라고 하여 이 때 대대적인 개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 때에는 궁내 전각의 개명이 있었는데 조계청(朝啓廳)은 선정전, 후동별실(後東別室)은 소덕당(昭德堂), 후서별실은 보경당(寶慶堂), 정전은 양의전(兩儀殿), 동침실은 여일전(麗日殿), 서침실은 정월당(淨月堂), 누는 징광루(澄光樓), 동별실은 응복정(凝福亭), 서별실은 옥화당(玉華堂), 누하(樓下)는 광세전(廣世殿), 광연루 별실은 구현전(求賢殿)이라 하였다.[註]
연산군대에 들어와 왕은 창덕궁내의 많은 전각의 개수를 명하였으며 특히 그의 재위말년에는 무리한 명을 내렸다. 그러나 실록에는 실제로 영건(營建)이 이루어진 건물에 대하여는 기록하지 않았다. 연산군이 공사를 명한 창덕궁내 전각을 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연산군 2년에 대조전의 중수, 수문당의 개작(改作), 대조전 전랑(前廊)의 개작을 명하였다. 이 때 중신들은 공역을 벌이지 말 것을 요청하였고 왕은 대조전이 당(堂)은 낮고 낭(廊)은 높아 집에 바람이 통하지 않음을 이유로 중수를 주장하였으나[註] 공사의 착수 여부는 미상이다.
연산군은 재위 말기인 연산군 8년 이후로 왕명에 반대하는 신하는 모두 처형하는 폭정을 하였는데 이 때 수많은 전각의 개조를 명하였던 것이다.
즉 연산군 8년 1월에는 선정전을 수리하도록 하고 돈화문에서 인정전까지 단청(丹靑)을 고치도록 하였으며 선정전 월랑(月廊)의 수리를 명하였다.[註] 연산군 9년에는 금호문(金虎門)과 서행랑(西行廊)의 병문(屛門)을 고쳐세워 높고 크게 하도록 했고[註] 이듬해에는 연영문(延英門)을 고치고 선인문(宣仁門)에서 숙장문(肅章門)까지 어로(御路)를 만들도록 하였다.[註] 연산군 11년에는 인정전과 선정전을 모두 청와(靑瓦)로 할 것을 명하였다.[註] 그러나 연산군 말년은 국정이 극도로 혼란한 때였으며 연산군 11년에 반정(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그가 벌인 공사가 모두 중지되었으므로 연산군 말년에 명한 창덕궁내 조영은 대부분이 실현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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