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창덕궁은 물론 경복궁과 창경궁은 전소되었다고 믿어진다. 난이 종식되고 제일 먼저 재건에 착수된 것이 창덕궁이며 공사는 선조 말년에 착수되어 광해초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중건 약 10년 후 인조반정시에 외전(外殿)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말았다. 소실되었던 전각은 25년 후에 복구되었는데 이 때는 인경궁(仁慶宮)의 전각을 철거하여 건물을 복구하였다. 이 후 영조 때까지는 소규모의 피재(被災)와 중건이 뒤따랐다.
임진왜란 후에 피재된 3궐(三闕) 중 창덕궁이 제일 먼저 복구되었던 것은 그 전까지 왕이 많이 거처하던 궁이 창덕궁이었고 경복궁이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하다는 의견이 작용을 하였던 것이라 한다.[註] 창덕궁은 광해군 즉위년(1609) 5월 종묘의 준공에 이어 그 해 8월에 인정전 등 중요 전각들이 대개 건립되었다. 공역은 이듬해까지 계속되었으며 사헌부의 요청으로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을 파하고 나서도 궐내의 각 아문(衙門) · 상고(廂庫) · 동궁(東宮) 및 궁장(宮墻)의 수축 등은 계속되었다고 한다.[註]
「이어한 지 오래지 않아 요언(妖言)이 있어 경운궁으로 돌아갔다.」
「의군(義軍)이 창의문에서 들어와 이 문을 지나 창덕궁에 이르자 돈화문의 수문장은 문을 열어 영입하였다. (이들이)나무 쌓아 놓은 곳에 방화하자 불이 궁궐에 미치었다.」
고 하였다. 이 때 화재를 면한 건물로는 외전(外殿)의 인정전과 도총부 · 내약방 · 춘추관 · 도총부랑청방 · 비승각 · 홍문관 등과 내전(內殿)의 수정당 등이었다.[註]
인조반정시에 소실된 창덕궁의 전각은 인조 25년에 들어와 외전의 인정전동월랑 · 승정원 · 선정전 등 314칸과 내전의 대조전 · 희정당 · 보경당 등과 주변의 행각(行閣) · 월랑(月廊) 등 421칸 등 도합 735칸이 재건되었다. 이 공역은 인조 25년 6월에 시작되어 불과 5개월 후인 11월에는 필역(畢役)하였는데 700여 칸의 전각을 이와 같이 단시일내에 끝마치게 된 것은 전각의 재건을 위하여 인경궁의 전각을 헐어내어 그 자재를 그대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註] 따라서 이 때 재건된 창덕궁의 전각 중에는 인경궁의 전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문비(門扉) · 포재(包材) 등 주요 자재가 그대로 이용된 것도 상당수에 달하였다. 이것은 창덕궁의 조영사상(造營史上) 매우 흥미로운 일로써 창덕궁이 구기(舊基)에 그대로 재건되기는 하였으나 건물의 형태가 인경궁의 전각을 상당부분 그대로 옮겨 놓은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창덕궁의 조성 전각을 위하여 철거된 인경궁 전각의 명칭과 칸수(間數)는 ?font face="서울세명조2">廊절 궁궐지(宮闕址) 인경궁편에 명시되어 있음)
第1所:大造殿 45間, 集祥堂 20間, 澄光樓 上下層 40間, 玉華堂 10間半, 靜默堂 10間半 및 行閣 · 月廊 등 241間半
第2所:熙政堂 15間, 承明門內行閣 등 69間, 內班院 10間 등 169間
第3所:寶慶堂 9間, 泰和堂 12間, 昭德堂 8間 및 月廊 · 燒廚房 등 111間
第4所:宣政殿 9間 및 北月廊 등 114間
第5所:仁政殿東月廊 28間, 承政院 16間, 臺諫廳 4間, 仁政門外 南月廊 8間 등 200間」
각 소(所)가 조성한 전각은 그 자재를 인경궁 전각을 철거하여 얻은 것으로 하였는데 그에 따라 어떤 전각은 인경궁의 건물을 그대로 옮긴 것도 있으며 그 밖에 많은 건물들이 철거해온 자재를 그대로 활용하였다. 그 중 건물을 그대로 이건한 대표적인 건물을 들면 선정전이 있다.
이 밖에도 창덕궁 재건에는 인경궁에서 철거되어 온 창호 · 문 등의 자재가 대부분 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인조 25년의 창덕궁 재건은 인경궁의 건축형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