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이후의 창덕궁 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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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조 이후 대한제국 말에 이르는 사이에 창덕궁은 몇 차례의 화재를 당하였으며 그 때마다 많은 전각들이 중건되었다. 우선 순조 초년에는 인정전이 불에 탔다가 바로 중건되었으며 순조 33년에는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 대부분이 소실되는 큰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이듬해에 중건되었다. 창덕궁은 일제 때에 들어와서도 대조전 일대가 피재(被災)되었으며 전각 일부가 복구되었다.
순조초에 인정전이 소실된 데 대하여 실록에

「인정전이 재(災)하였다. 유시(酉時)에 선정전 서행각(西行閣)에서 화기(火起)하여 인정전에 연소(延燒)하였다.[註]

라 하였다. 이 일은 순조 3년 12월에 일어났다. 조정은 피재된 그 달에 바로 인정전영건도감(仁政殿營建都監)을 설치하여 12월 27일 묘시(卯時)에는 개기시역(開基始役)이, 동일 신시(申時)에는 정초를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3월 15일에 대신들이 정역(停役)을 요청하여 공사는 중지되었다가 8월 20일에 가서야 새로이 치목(治木)을 하고 다시 9월 9일에 정초하였다. 상량(上樑)은 10월 27일에 하였으나 그 후에도 어탑(御榻)을 넣고 오봉병(五峯屛)과 곡병(曲屛)을 꾸미어 필역한 것은 12월 17일에 이르러서였다.
순조 33년에 들어와서 창덕궁은 또다시 대화를 당하게 되었으며 이 때 불은 내전의 거의 대부분을 태워 버렸다. 이 해 10월 갑인조(甲寅條)의 실록에는

「밤 4경(四更)에 창덕궁 대조전 및 희정당에 불이 나 징광루(澄光樓) · 옥화당(玉華堂) · 양심각(養心閣)으로 옮겨 붙어 타버렸다.」



「11月 15日 辰時:定礎 11月 26日 申時:大造殿 · 熙政堂 · 澄光樓 立柱 12月 4日 申時:大造殿 · 熙政堂 · 澄光樓 上樑 純祖 34년 9月 28日:畢役」



「哲宗 5年 9月 23日:治木始役
哲宗 6年 正月 25日:因傳敎停役
哲宗 8年 正月 26日:更爲始役
2月 16日:機械始役
3月 1日:撤毁始役
3月 20日:御間東邊大樑奉出仍爲入排
3月 25日:上下層月臺入排始役
4月 13日:蓋瓦始役
4月 22日:上下層丹靑始役
4月 25日:蓋瓦畢役
5月 5日:懸板入揭
5月 7日:上下層月臺入排畢役
5月 29日:上下層丹靑畢役
閏5月 3日:曲屛入排
同月 6日:畢役草記入啓」


「인정전 중건 때 감동당상(監董堂上) 이하에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註]

고 적었다.


「창덕궁 · 창경궁 두 궁궐 수리시에 별단(別單)에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註]

고 기록하였다.
창덕궁이 마지막으로 크게 화재를 입고 다시 중수가 된 것은 일제 때로 화재는 1917년에 발생하였고 중수가 이루어진 것은 1920년이었다. 당시는 일제 강점 이후로 정권이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 간 후이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실의 속에 창덕궁에서 지낼 때였다. 그러던 1917년 겨울인 11월 10일에 대조전 서쪽으로 연접되어 있는 나인(內人) 갱의실(更衣室)에서 불이 일어나 불길이 내전으로 번졌다. 순종과 황후 일행은 후원 연경당(演慶堂)으로 피했으며 이 불로 대조전을 위시하여 흥복헌 · 통명문 · 양심각 · 장순문 · 희정당 · 찬대실 · 내전창고 · 경훈각 · 징광루 · 옥화당 · 정묵당 · 요화문 · 함원문 등 내전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화재 4일 후에 재후(災後)의 처리를 위하여 회의를 열었는데 이 때 피재(被災) 건물의 복작(復作)에 있어서는 한국식을 위주로 하고 양식의 건물도 짓기로 하였으며 1917년내에 시역(始役)하여 2년 후인 1919년에 준공할 것을 예정 계획하였다. 그리고 중건 건물은 경복궁의 제전각(諸殿閣)을 철거하여 이건(移建)하기로 하였다. 이 때 철거대상이 된 건물은 경복궁의 교태전 · 강녕전 · 동행각 · 서행각 · 연길당 · 경성전 · 연생전 · 응사당 · 흠경각 · 함원전 · 만경전 · 흥수전 등이었다.
중건 공역은 계획대로 진행되었으나 도중에 고종의 승하(昇遐)와 인산(因山), 3·1독립운동 등 궁중, 국중(國中)의 큰일이 있었던 때문인지 예정보다 1년이 늦은 1920년에 가서야 준공을 보았다. 이 때 중건된 건물은 대조전을 위시하여 희정당 · 흥복헌 · 경훈각 · 함원전 등이다.
일제 때에 창덕궁은 내외국인에게 관람을 허가하였으며 이에 따른 각종 시설의 개수가 있었고 전각의 태반이 철거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광복 후 일반의 관람이 증가하면서 남아 있던 전각들도 나날이 훼손되었고 특히 후원이 크게 변모되었다. 이에 따라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약 2년에 걸친 건물 및 주변의 정비가 이루어지고 일반인의 관람을 제한하여 더 이상의 훼손과 변모를 막고 현상을 유지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