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의 조성 연혁 (Ⅰ)
> 문화사적 > 궁궐과 제궁 > 창덕궁 > 창덕궁 후원의 조성 연혁(Ⅰ)
 

   창덕궁에 후원이 조성된 것은 태종 때에 이궁(離宮)으로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거의 비슷한 때에 비롯되었다. 이후로 창덕궁 후원은 점차 원역(苑域)을 넓혀 나가고 원내에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궁궐의 후원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으며 특히 왕이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한 세조조에 크게 궁장(宮墻)을 넓히고 새로운 연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후원은 한때 황폐를 면치 못하였으며 광해조(光海朝)에 들어와 다시 옛 모습을 찾게 되었고 인조 연간(年間)에 많은 정자들이 세워지고 옥류천(玉流川)을 새로이 파고 주변에 정자를 만들게 되어 조선왕조의 가장 규모가 크고 풍치가 가장 돋보이는 궁원으로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창덕궁 후원은 옛 기록에 후원(後苑) 외에 후원(後園) · 북원(北苑) · 북원(北園) · 금원(禁苑) 등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일제 때에는 비원(秘苑)이라고 불리었으나 왕조실록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불리어진 명칭이 후원이었다.[註] 따라서 이 곳은 근대에 비원이란 명칭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최근에 이르러 일반적으로 후원으로 칭하게 되었다.


「창덕궁 동북우(東北隅)에 해온정(解?亭)을 지었다.」

태종 때 정자가 건립된 이후 창덕궁 후원은 별다른 조원(造苑)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주위도 그다지 넓은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태종 다음 왕인 세종이 주로 경복궁에 소어(所御)하였던 관계로 창덕궁이 그다지 이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조조에 들어서자 왕이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고 나서 후원은 연못이 새로 만들어지고 주위에 정자가 세워지게 되었다. 우선 세조 5년 9월에는

「후원에 어(御)하여 좌우로 나누어서 착지(鑿池)하였다.[註]

고 하였고 7년 11월에는

「열무정(閱武亭)에 어(御)하였다.[註]

고 하여 후원에 새로이 연못을 파고 정자가 세워졌음을 알려준다.


「열무정(閱武亭)… 곁에 우물 넷이 있었다. 술성각(述盛閣)은 열무정 북쪽에 있는데 바로 사정기(四井記)의 비각이다.」



「상(上)이 창덕궁성을 증광(增廣)하고자 계양군(桂陽君) 등에 명하여 기지(基地)를 관심케 하고 사주(賜酒)하였다.[註]

고 하며 동 8년 정월에는

「상(上)은 창덕궁 후원이 천협(淺狹)하므로 동장(東墻)을 광축(廣築)코저 하였다. 이에 이르러 선공제조(繕工提調)에게 기지(基地)를 심정(審定)케 하였다. 주위는 대략 4,200척이며 그 안에 인가가 73이다. 2월이 되면 철거하고 그 집주인에 3년의 복호(復戶)를 명하였다.[註]



「상(上)은 중궁과 더불어 창덕궁에 행(幸)하여 궁장(宮墻)의 광축기지(廣築基地)를 관상(觀相)하였다. 앞서 궁장을 넓히고저 궁의 동북동 인가를 철(撤)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다시 북장저(北墻底)의 인가 58구(區)를 철하였다. 주위는 대개 4천호이다. ……전하여 왈 동점(東?)은 역시 주산래맥(主山來脈)이니 성외(城外)에 있음은 옳지 않으니 다시 축장(築墻)하여라. 여기서 다시 백척(百尺)을 퇴축(退築)하였다.」

라고 하였다. 즉 시역(始役)하면서 당초의 예정과는 달리 동장(東墻)의 증광(增廣) 뿐 아니라 북장(北墻)도 넓히었고 동장 또한 다시 동점까지 더 퇴축한 것이다. 여기서 동점이란 성균관과 경계를 이루는 산 언덕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註]
다음 연산군대에도 약간의 건물 조성이 있었다. 우선 연산군 3년초에 후원의 서장(西墻)을 높이 개축하였고[註] 9년에는 동장 · 서장의 장저(墻低) 민가들을 철거하였다.[註] 이것은 왕이 궁내(宮內)가 밖에서 들여다보이는 것을 크게 꺼리어 명한 것이었다. 연산군 10년 7월에는 정자의 조성을 명하였는데 실록에

「전하여 왈 … 열무정 · 칠덕정 · 희우정을 아울러 조성할 것을 명하였다.[註]

고 하였다. 열무정은 이미 세조 때 조성된 것이었는데 퇴락된 것을 이 때에 다시 조성토록 한 것으로 보이며 그 외에 칠덕정 · 희우정을 조성토록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