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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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 이성계의 도성 경영에서의 첫 일은 묘사(廟社)와 궁궐과 조시(朝市)와 도로의 터전을 정하는 일이었다. 심덕부(沈德符), 김주(金湊), 이염(李恬), 이직(李稷)의 제조(提調)들과 함께 정도전이 이 일을 맡았다.
태조 4년 4월에 용산에 행차하여 목장을 살피는데 그에 앞서 반송정(盤松亭)에 들러 궁궐 서쪽에 장생전(長生殿)을 지어 공신의 도상(圖像)을 걸도록 한다. 이 일은 태조 4년 7월에 시작되었다. 강원도에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함부림(咸傅霖)을 보내어 장생전 신축에 쓸 목재를 특별히 마련하도록 하였다. 윤9월에는 태평관(太平館)을 짓고 11월에 문묘(文廟)를, 이듬해 정월에는 소격전(昭格殿)을 지었다. 2월에 금천교(錦川橋) 이웃의 80여 호가 재화를 입었다. 고려시대 이래의 남경(南京) 경영으로 새로운 도성의 건설 부지에 이미 약간의 관아 건물과 객사, 이궁(離宮) 등의 궁실 건물, 그리고 백성들의 살림집이 있어 역사(役事)에 관여하는 대소 신료들이 머물 수 있었다. 재화에 휩쓸린 80여 호는 이들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도시계획에 따른 방리조제(坊里條制)는 4월에야 본격화하여서 한성부에서 5부방(部坊)에 명표(名標)를 세웠다. 5월에 종루가 세워진다. 이 시기에는 조시(朝市)의 건설도 상당히 진척되어 사복시(司僕寺) 등이 완성되어 있어서 사복시의 서쪽에 세마지(洗馬池)를 파게 한다.
동년 9월에는 승하한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을 만들고 이듬해 2월에 정릉의 원찰(願刹)로 흥천사(興天寺)를 짓기 시작한다. 도성내에 경영된 첫 사원 건축물이 되나 태조는 한양성 이웃의 지천사(支天寺), 진관사(津寬寺), 인왕사(仁王寺) 등에 가서수륙재(水陸齋)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6월에 문묘를, 8월에 제생원(濟生院)을 두고 태일전(太一殿)을 파하고 소격전(昭格殿)에 합치게 하였다. 10월에 유비고(有備庫)를 짓기 시작하고 섣달에는 사수감(司水監)에 행차하여 병선을 사열하였다. 11월에 대소 신료들이 도성내에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집터를 나누어 주었다. 각 품에 따라 분급(分給)할 대지(垈地)의 넓이에 대하여는 4년 정월에 이미 ‘정일품 삼십오부 강살이오 지우육품십부 서인이부(正一品 三十五負 降殺以五 至于六品十負 庶人二負)’라고 정한 바 있어 누구에게 어느 곳의 터를 주느냐의 실제적인 작업이 진행되었다.
7년 정월에는 빙고(氷庫)를 마련하고 4월엔 종루(鐘樓)를 지었다. 이 때에 대풍이 불더니 새로 지어 완성한 군자고(軍資庫)가 약간 무너졌다.
이 때쯤에는 앞서 나누어 준 가기(家基)에 이미 집 짓는 일들이 상당히 진척되어 제법 도성의 면모를 이룩하리만큼 되었다. 그러자 5월에 큰불이 났다. 가회방(嘉會坊)의 한 살림집에서 불이 났는데 강풍에 불길이 번져 143채가 연소되었고 요물고(料物庫)도 함께 탔다. 곧 복구를 위한 배려가 있었고 요물고는 궁성 안으로 옮겨 다시 지었다.
5월에는 강화의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대장경판을 배에 싣고 용산강까지 와서 지천사로 옮기는 일을 하였다. 이 달에 유비고를 두었고 흥천사의 사리전(舍利殿) 짓는 일이 시작되었다.
윤5월에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새 아사(衙舍)를 짓기 시작하였다. 6월에는 동서요(東西窯)를 두어 기와 공급을 원활하게 하였고 반송정(盤松亭)에 태조가 나가 사신을 맞이하였다. 7월에 태조는 청화루(淸和樓)에 간다.
대략의 내용이지만 태조 때의 경영으로 도성과 도성내의 요긴한 건축물은 거의 구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의 관서(官署)들이 경복궁 주변에 즐비하게 경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관아라고 할 수 있는 한성부와 그 산하의 각 관아 소속의 아사들도 대부분 구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종이 사세에 몰려 개성으로의 환도가 감행되자, 한성의 시설은 일시 폐기되는 상태가 되나 한성부의 능력만으로는 그 관리가 어려웠다. 따라서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하였을 때엔 백성들에 의하여 잠식된 도로가 꾸불꾸불해져서 곧바로 열었던 태조 때의 평직(平直)한 대로(大路)와는 달라져 있었다. 이것을 바로잡는 일이 큰 일이었고 이미 없어진 방명(坊名), 교명(橋名), 가명표(街名標)를 세우는 작업도 수월치가 않았다. 개경이 중심이었던 시절의 경제권의 이동은 한양 성내의 백성의 집들이 초가집으로 초라하게 바뀌어 가는 경향이 되었다. 환도하였을 때 이들의 집을 다시 기와집으로 바꾸어 가야 하는 일도 대단한 과업으로 등장하였다.
경제 회복이 이런 퇴폐된 시설들을 재생하는 데 첩경이 된다는 정책을 세우고 저자의 활성화를 꾀하였다. 큰 저자를 장통방(長通坊)과 경행방(慶幸坊)에 열었다. 동부의 연화동(蓮花洞) 어구와 남부의 훈도방(薰陶坊), 서부의 혜정교(惠政橋), 북부의 안국방(安國坊), 중부의 광통교(廣通橋)에 작은 저자를 열도록 하고 우마(牛馬) 등의 가축 거래는 장통방의 개울가를 이용하게 하였다.
태종 10년에 큰비가 내렸다. 청계천이 넘쳐 광통교가 떠내려가 버렸다. 신덕왕후의 정릉을 도성 밖으로 천장(遷葬)시키고 거기의 석재들을 옮겨다 광통교를 석조하였다. 청계천의 범람은 큰일이었다. 태종은 11년에 준설할 것을 지시하였고 이직(李稷), 박자청(朴子靑), 이응(李膺) 등을 제조(提調)로 차하하여 52,800명을 동원하여 완성하였다. 이 때의 공사 내역은 청계천의 양쪽 둑을 정리하여, 장의동에서 종묘 동구(洞口)까지와 문소전(文昭殿)에서 창덕궁 문 앞까지는 양안(兩岸)을 무사석으로 석축하고 종묘 동구로부터 수구문(水口門)에 이르는 양쪽 둑은 나무를 써서 방축하였다. 또 나무다리였던 대소의 광통교와 혜정교(惠政橋) 그리고 정선방동(貞善坊洞)과 신화방(神化坊) 동구 등의 다리들을 다 돌다리로 고쳐 세웠다.
청계천의 정비가 끝나자 태종은 그 기구를 행랑조성도감(行廊造成都監)으로 바꾸고 500명의 승군이 포함된 2,035명을 동원하여 행랑 짓는 일에 착수하였다.
혜정교 앞에서 창덕궁 동구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종로에 해당하는 시전(市廛)의 좌우 길가에 800여 칸의장랑(長廊)을 짓게 한 것이다. 이 공사에는 이미 강원도에서 13,000명을 동원하여 재목을 벌목하여 운송한 바 있었고 동서요에서 기와 굽는 일에 종사할 부역 인부를 따로 징발하였다. 완성된 행랑은 811칸이었고 그 첫머리와 끝에 2층 5칸의다락집을 세웠다.
물화의 증가와 유통의 빈번은 창고 수요를 증대시켰다. 태종은 용산강 안(岸)에 84칸의 군자고(軍資庫)와 서강안(西江岸)에 70칸 풍저창(儲倉)을 신축하게 해서 수요에 대비하게 하였다.
태종은 도성 이외의 각처에도 창고를 짓도록 하였다. 그 중 충주 강가에 세운 창고는 그 규모가 300칸에 이르렀다.
태종은 신덕왕후의 정릉은 도성 밖으로 천장하였지만 흥천사는 제자리에 그냥 두고 관리를 위한 보수공사도 실시하였다.
문묘는 정종 2년 2월 2일에 대성전이 소실되자 태종 7년 2월에 새로 짓는 일을 시작하였다. 대성전과 더불어 성균관 전체가 중건되는 대단위의 건축 공사가 진행되어 태조 창건 당시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고 신주(神廚)와 동서문이 신설되었다. 태종은 또 원구단의 설치 공사도 진행하였다.
태종은 창덕궁을 이궁으로 경영하여 임어소(臨御所)로 사용하였고 퇴위한 뒤로는 풍양 등의 이궁에 머물다가 세종 3년에는 수강궁(壽康宮) 완성에 따라 도성내에 머물고 다시 천달방(泉達坊)의 이궁이 완성되어 이어하여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태종은 경복궁과 경회루를 대규모로 증축하는 일과 더불어 서대문 밖에 모화루(慕華樓)를 짓고 남지(南池)를 조성하고 또 태평관을 증축하였다.

「家舍 大君 六十間 王子 · 君 · 公主 五十間. 翁主及宗親 · 文武官二品以上 四十間. 三品以下 三十間. 庶人 十間. 다듬은 돌을 사용할 수 없다.화공(花)과 초공(草)을 구조할 수 없다.」

고 하였다.
영선조(營繕條)에는 궁궐은 전연사(典涓司)에서 맡고 공해는 각기 그 마을의 관원이 책임지고 분장 간수하게 하였다는 내용과 누훼처(漏毁剔8가 있으면 공조에 보고하고 수리하되 매년 봄 · 가을에 정기적으로 순찰하여 살피는 일도 계속하였다. 외방 공해의 보수는 공조에 아뢴 뒤에 시행하는 방법을 따랐다. 제천정(濟川亭) 등의 원우는 소속의 관장들이 맡아 수보하는 일을 원칙으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