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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는 여러 분야의 소임이 있어야 하였다. 소임을 맡은 대소의 관리들은 그 일을 전담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였다. 상대(上代)로부터의 일이었다고 보이는데 거점을 위하여 관아(官衙)의 건축물이 경영되었다.
관아 경영이 삼국시대 이래 계속되었겠지만 그 건축물의 형용이 어떠하였는지는 분명하지 못하다.
조선조가 건국되고 한양에 도읍을 건설하면서 새로운 관아의 건축물들이 조영된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태반의 관아 건축물들이 훼손되거나 병화(兵火)에 소실되어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지금 알 수 있는 관아의 건물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 또는 그보다 시대가 더 늦은 조선조 말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조영한 것들뿐이고 유구(遺構)를 남기고 있는 것은 매우 드물다. 일본인들이 식민지 정책을 시행하면서 불하 매각하여 훼손시키는 의도적인 말살에 따라 대부분이 쓰러지고 말게 되었다. 몇몇의 유구(遺構)가 남아 있지만 여러 아사(衙舍) 중에서 극히 일부로서 여러 건물이 일곽을 이루었던 전모를 알아보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오히려 남아 있는 문헌을 통하여 당시의 관아 건물들의 포설상(布設狀)과 함께 그 규모를 인식할 수밖에 없다.
관아 건축물의 실상을 알아보기 전에 도성내에 건축되어 있었던 각종 관아가 어느 정도이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방(吏房)은 종친부(宗親府), 이조(吏曹), 사헌부, 통례원(通禮院), 경상도(서울에 파견 나와 있는 분소)와 유관하고, 호방(戶房)은 북부, 예조, 충훈부(忠勳府), 혜민서(惠民署), 사직서(社稷署), 군자감(軍資監). 홍문관, 훈련원, 종묘서(宗廟署), 장악원(掌樂院), 전의감(典醫監), 총융청(摠戎廳), 강원도와 연관되어 있다. 예방(禮房)은 중학(中學), 중부, 돈녕부(敦寧府), 병조, 승정원, 상의원(尙衣院), 사역원, 내자시(內資寺), 관상감, 교서관, 내수시,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 금위영, 제용감(濟用監)과 경기도와 유관하며, 병방(兵房)은 남부, 남학(南學), 의정부, 의빈부(儀賓府), 호조(戶曹), 위장소(衛將所), 봉상시(奉尙寺), 예빈시, 사복시, 광흥창(廣興倉), 사섬시(司贍寺), 빙고(氷庫), 전라도와 연관이 있다. 형방(刑房)은 동부, 동학(東學), 중추원(中樞院), 형조(刑曹), 도총부(都摠府), 성균관, 승문원(承文院), 사간원, 사옹원(司甕院), 내의원, 선공감(繕工監), 풍저창(淵儲倉), 양현고(養賢庫), 의영고(義盈庫), 사포서(司圃署), 전생서(典牲署), 내섬시(內贍寺),와서(瓦署), 전옥서(典獄署), 어영청(御營廳), 충청도 및 함경도와 유관하며, 공방(工房)은 서부, 서학(西學), 의금부, 예문관(藝文館), 춘추관, 공조(工曹), 내시부(內侍府), 종부시(宗簿寺), 장흥고(長興庫), 사축서(司畜署), 사도서(司導署), 소격서(昭格署), 사재감(司宰監), 문소전(文昭殿), 연은전(延恩殿), 도화서(圖畵署), 훈련도감과 평안도, 황해도와 연관을 가졌다.
그것을 정리하여 보면 표<조선시대의 관아(官衙)>와 같다.
이들 조선조 초기의 공해들은 궁내와 북부에 집중되어 있고 동 · 남부(東 · 南部)에는 극히 일부의 관아가, 성외에도 일곱 개 마을에 아사를 설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조 후기에도 비슷한 경향이었다고 보이나 각각의 관아들은 여러 번 그 자리를 옮긴 경우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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