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부(漢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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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부도 정2품아문에 속한다. 중부 징청방(澄淸坊)의 호조 · 이조에 이웃한 자리에 처음 자리잡았다. 판윤(判尹) 등의 당상(堂上)이 집무하는 곳이 한성부의 중심 건물이다. 서향한 정면 3칸, 측면 4칸의 규모이었는데 평면에서 중앙에 있는 6칸의 대청에서 판윤이 집무를 하며 그 좌우에 아방(兒房)이, 이들의 전후로 퇴가 설치되어 있다. 당상청(堂上廳)의 동편, 즉 건물 뒤편에 연지(蓮池)가 있다. 옛날엔 북쪽에 승발방(承發房)이 있었으나 후대엔 없어졌다.
버금가는 건물은 당상청의 남쪽에 있는 낭청대청(郞廳大廳)이다. 역시 서향하였는데 중앙의 대청은 퇴까지를 합쳐 6칸이다. 대청의 남쪽으로 서윤(庶尹)이 쓰는 칸 반(半) 크기의 온돌방이 있으며 역시 반칸(半間)의 툇간(退間)이 부설되어 있다.
대청의 북쪽에 방이 있고 여기에서 꺾이면서 방이 계속되어 남향하게 되는데 이 상방(上房)의 규모는 3칸이며 반칸의 툇간이 달려 있다. 근접하여 서쪽으로 다모간(茶母間) 1칸이 있고 이어 대솔청(帶率廳) 1칸과 방 1칸이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서 다시 꺾이면서 남쪽으로 고직사고(庫直私庫) 2칸이 있는데 이것은 동향하였다.
낭청대청의 서쪽 마당에는 호적고(戶籍庫) 8칸이 있는데 다락집으로 누상이 적고(籍庫)이고 누하는 마굿간 2칸, 다음은 낭청(郞廳)의 정문이며 다음은 협문(挾門)이고 다음엔 적고 4칸이다. 그 북쪽엔 당상청의 정문이 삼문(三門)으로 건립되어 있다.
삼문의 가운데 문으로는 수당상(首堂上)이, 좌우 협문으로는 차당상(次堂上)들이 출입한다. 북협문(北挾門)은 쓰지 않게 되었는데 이 문의 북쪽에는 서리상직방(書吏上直房) 1칸과 청(廳) 2칸, 방직사고(房直私庫) 1칸이 있고 다시 북쪽에 서리청(書吏廳) 18칸이 있다. 그 남쪽에 중문 1칸이 있다.
서리청의 동편으로 신당(神堂) 4칸과 고(庫) 1칸이 있고 마당 건너에는 북향한 숙설청(熟設廳) 5칸이 있다.
당상대청(堂上大廳)의 적고는 북쪽에 40칸, 동쪽에 36칸, 그 남쪽에 11칸이 있어 서로 연접(連接)하였다. 동북각(東北角)에 호방서리청(戶房書吏廳) 6칸이 있고 뒷문의 안쪽 편으로 감동청(監董廳) 3칸과 방 1칸의 건물이, 그 동편으로 호적청(戶籍廳) 13칸 적색서리서역방(籍色書吏書役房) 3칸이 있다.
이러한 본아(本衙)와는 별도로 돈화문 밖 선전관청직방하(宣傳官廳直房下)에 따로 직방(直房)을 갖고 있었다. 직방의 규모도 적지 않았다. 당상대청은 안방 2칸 대청 3칸 건너방 1칸과 주(廚) 1칸으로 지었다. 낭대청(郞大廳)은 방 1.5칸, 대청 2칸, 부엌 1칸의 규모이고 낭대청의 북쪽편에 서리청이 더 있는데 방 1.5칸, 대청 1칸, 서향한 주 1칸이 부설되어 있고 따로 대문 2칸이 남향하여 있었다. 이 외에도 여러 채의 건물들이 더 있어서 업무 수행하는 관리들의 편의가 도모되었다.
한성부를 두고 태조는 최초로 판사(判事), 윤(尹), 소윤(小尹), 판관(判官), 참군(參軍) 각 2인씩으로 하여금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도성의 경영이 완성된 태조 3년(1394)에 이를 판부사(判府事), 윤, 소윤, 판관, 참군의 직제로 바꾸었다. 예종은 판부사를 판윤(判尹)이라 하여 1원(員)을 두고, 윤은 좌윤(左尹)과 우윤(右尹)을 두어 각 1인으로 하고, 소윤은 서윤(庶尹)이라 고치고 1인이 소임 맡게 하고 판관 2인과 참군 3인(그 1인은 타관(他官)이 겸임)을 두었다.
숙종은 판관 1원과 참군 1인을 줄였고 영조는 즉위 초에 참군 1인을 주부(主簿)라 고치었고 다시 40년(1764)에 나머지 참군 1인도 주부라 부르게 하여 이속(吏屬)시켜 그 휘하에 서리(書吏) 41인 서사(書寫) 1인, 서원(書員) 11인, 사령(使令) 30명이 있었다.
한성부의 본아는 갑오개혁 이전까지는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었으나 광무 7년(1903)에는 경기 감영의 귀빈관(貴賓館)에 옮겼다가 융희 2년(1908)에 다시 광화문의 지금 정보통신부 자리에 있었던 형조의 본아로 옮긴다.
개국 504년(1895) 5월의 관보(官報)에 경무청(警務廳)이 한성부에 이관됨에 따라 옛 군기시(軍器寺, 지금의 서울시청 자리)로 옮겼다고 하였다. 광무 5년(1901) 5월의 관보에는 한성부와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가 전동(典洞)으로 옮겼다고 하였는데 이는 임시적인 이전이었다고 이해된다.
한성부의 한 해 동안의 소요 예산은 광무 6년(1902)에 6,124원(元) 이듬해 7년엔 6,144원(圓)이었다가 10년에는 6,193원이 된다. 이 때의 예산 세목은 월급이 4,200원, 청비(廳費)가 800원, 수리비(修理費)가 25원, 잡비가 1,128원 그리고 여비가 40원이었다고 한다. 이에 비하여 융희 2년의 소요 예산은 14,869원으로 대폭 증가되었다.
한성부에는 5부(部)의 하급 기관이 있었다. 영(令) 각 1인, 녹사(錄事) 각 2인을 두고 관장하게 하였다가 이를 주부 각 1인, 참봉(參奉) 각 2인으로 고쳤으며 후에 참봉은 1인으로 줄였다.
영조 18년(1742)에 주부를 도사(都事)라 하고 참봉을 봉사(奉事)라 고쳤다. 이를 정조 16년(1792)에 영 1인, 도사(都事) 1인을 두고 그 휘하에 서원(書員) 4, 사령(使令) 8, 대청직 1, 군사 2명씩을 배속시켰다.
이들이 근무하던 공해가 어떤 규모이었는지에 대하여는 아직 밝혀진 바 없어 자세하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