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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되었을 때의 모습을 문묘비에서 읽을 수 있다.
「성철(聖哲)의 묘우(廟宇)는 높은 곳에 자리잡고 종사(從祀)는 방서(旁序)하였다. 학(學)은 묘후(廟後)에 있으며 가운데에 명륜당이 있고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으며 양협실의 남쪽에는 낭(廊)을 꾸미었다. 좌협실의 동쪽에는 청(廳)과 낭이 있어서 사생지위(師生之位)와 정록소처(正錄所剔8가 모두 완성되었다.」
고 하였는데 이 때의 건물이 96칸이었다. 성현을 모시는 문묘와 학교인 성균관이 이 때에 첫 완성을 보았던 것인데 이 제도는 이후 계속되어서 향교에서도 문묘와 학교가 한 구역내에 병설되게 하였고 이는 서원에서도 사우(祠宇)와 강당(講堂)이 함께 경영되는 규범이 되었다.
문묘는 정종 2년(1400)에 화재로 소실되어 태종 7년(1407) 3월에 재건되었다. 태조 때의 제도에 따라 중건하는 일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추가로 문묘 서편에 신주(神廚) 세우는 일과 양무하(兩黛下)에 동서의 문을 내기도 했다.
태종 13년(1413)에 동서재(東西齋)를 수리하고 식당도 새로 짓는다. 세종도 생도들에게 습질(濕疾)이 많다는 말을 듣고 공조로 하여금 동서재의 5칸을 수리하게 했는데 세종 7년(1425) 7월의 일이었다. 이 공역은 건축사에서는 아주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 생도들의 습질을 치유시키기 위하여 5칸에 온돌(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