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조의 공해(公力) 중개건(重改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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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후 중건된 관아의 해사(舍)들도 역대에 제각기 개건과 보수가 이어지면서 고종대에 이르렀다. 이 때는 대한제국으로서도 종언을 고하게 되는 시기여서 개화의 물결과 함께 자극되어 온 외세에 따라 격동기를 겪는다. 건축 양식 또한 이러한 경향으로 변모되었다. 재래의 해사도 개화에 따라 도입되기 시작하는 신식의 건축물을 사용하게 되어 아사(衙舍)의 내용은 다양하게 되었다.
갑신정변 등의 혼란과 중앙 관제의 변혁 시도 등에서 관아의 제도는 탁류에 휘말리게 되었고 일본인들의 간섭과 더불어 식민지화의 전초적인 공작으로 지방관아들이 폐쇄되거나 아사가 이관되고 마침내는 개인에게 불하되어 훼철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한 사건들 중에서 고종 1년부터 32년까지의 사항을 일람표로 적기(摘記)하여 봄으로써 변모하는 사정을 일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고종 1년∼32년 간의 공해 중개건 및 수보(修補)】

【고종 원년(1864)】
2월 20일
훈련원의 해우(宇)가 낡아서 거의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내하전(內下錢) 1,000냥(兩)으로 보용수리(補用修理)하게 하였다.
5월 19일
큰불이 나서 광통교(廣通橋)의 지전(紙廛)으로부터 종각까지의 여러 건물이 불에 탔다. 종루도 연소되었다.
5월 20일
어영대장(御營大將) 임태영(任泰瑛)이 공해와 군물(軍物)의 보수에 애써 노력한 공로가 컸으므로 가자(加資)하였다.
5월 24일
종각 개건역(改建役)이 다 끝나지 않았으나 우선 종을 걸었다.
5월 28일
종각 개건역사가 끝났다. 공로가 많은 감동당상(監董堂上)에게 시상하였다.
6월 6일
금위영과 운현궁 사이에 문을 특설하였다.
12월 26일
면세전(綿細廛) 등 95칸 도가(都家) 중건할 물력(物力)으로 선혜청의 갑주가미중(甲胄價米中)에서 절전(折錢) 5,000냥(兩)을 대하(貸下)하고 5년 동안에 분할 상환하도록 하였다.

【고종 2년(1865)】
1월 27일
의정부의 해우가 경퇴(傾頹)가 자심하므로 개수하게 하고 1월 29일에 중건비용 20,000냥을 하송(下送)하였다.
3월 2일
준천사(濬川司)에서 준천작업(濬川作業)을 시작하였다.
3월 8일
준천작업, 경비 8,900냥을 삼영문(三營門)에 분급(分給)하였다.
3월 11일
준천작업, 각 군문(軍門)의 장교들과 각 사원(司員) · 시인(市人) · 공인(貢人) · 액례(掖隸) · 제사(諸司)의 관생(官生)들과 각 도의 저리(邸吏) 등을 동원하여 3일씩 부역하게 하고 각 영(營)의 군병과 각 사(司)의 도예(徒隸)와 공장군(工匠軍) 등은 각 이틀씩 부역하게 하였다.
4월 2일
경복궁영건도감(景福宮營建都監)을 설치하고 제조(提調)들을 차하(差下)하였다.
10월 1일
의정부의 중건공역(重建工役)이 준성(竣成)되었다.

【고종 3년(1866)】
12월 20일
장보각(藏譜閣)의 실화(失火)

【고종 4년(1867)】
5월 7일
어영청의 실화로 군기고(軍器庫) 15칸이 불에 탔는데 창고 속에 보관되어 있던 목면(木綿)과 갑주(甲胄) 등 110건이 소실되었다.

【고종 5년(1868)】
9월 7일
영건도감(營建都監)에 명하여 경사(京師)의 각 성문(城門)을 개수(改修)하도록 하였다.

【고종 6년(1869)】
3월 16일
흥인지문(興仁之門)의 공역이 준성되었다. 이 때에 좌우성벽을 증축하였고 수문(水門)도 별설(別設)하였다.
6월 11일
문묘의 개수역(改修役)이 시작되었다. 8월 전에 끝내라고 하명, 선혜청의 갑주대전(甲胄代錢) 2,000냥과 책목(冊木) 2,000근(斤), 백반(白礬) 1,000근을 경비조(經費條)로 영건도감에 하송(下送)하여 주었다.
9월 4일
새벽에 시전에 불이 나서 종각이 또 불에 탔다. 곧 개건(改建)하라고 하명하다.
9월 31일
성균관의 문묘 공사가 완성되었다. 기념으로 왕이 비천당(丕闡堂)에서 응제시(應製試)를 설행(設行)하였다.

【고종7년(1870)】
9월 5일
정아(正衙)의 중수시(重修時) 궁문(宮門)에 대종(大鍾)을 달게 하였다.

【고종 9년(1872)】
6월 7일
군기제조역소(軍器製造役所)를 준공시켰다. 이를 위하여 선혜청전(宣惠廳錢) 중에서 3만냥을 획송(劃送)하였다.

【고종 10년(1873)】
2월 10일
선혜청 별창(別倉)에 불이 나서 미곡(米穀) 수만포(包)가 타 버리고 말았다. 곧 개건(改建)하도록 하명하고 2월 20일에 내탕금(內帑金) 10,000냥을 따로 내려 주었다.
3월 5일
병조에서 부족한 창고 10여 칸을 증축하였다.
4월 21일
준천사에서 준천의 공역이 다하였음을 상주(上奏)하다.

【고종 11년(1874)】
11월 1일
호조에서 전각개건(殿閣改建)과 무위소(武衛所)의 창설 비용이 호대하여 국고가 몹시 궁핍하였음을 상주하다.

【고종 12년(1875)】
5월 29일
경복궁 3전각의 중건 역사가 끝나기까지 궐내의 각 사(司) 수리 공사는 중지하게 하였다.

【고종 13년(1876)】
윤5월 24일
경기중영(京畿中營)을 개수(改修)하여 일본 이사관(理事官)이 머물 관우(館宇)로 삼았다.
12월 29일
북한산성 훈창(訓倉) 화약고의 실화(失火)로 보관하고 있던 화약 7,597근이 불탔다.

【고종 14년(1877)】
10월 9일
어영청(御營廳)에서 새로 짓는 야소탄고(冶所炭庫) 22칸이 불에 탔다.

【고종 16년(1879)】
4월 24일
경기중영(京畿中營)의 청수관(淸水館)에 일본 대리공사가 주재하기 시작하였다.

【고종 17년(1880)】
2월 15일
준천사와 한성부로 하여금 고종 2년의 예에 따라 준천하는 일을 하도록 하다.

【고종 19년(1882)】
6월 9일
일본 영사관인 청수관 불에 타다.
11월 6일
조벽소(造所) 학습을 위하여 김화선(金和善)의 유학을 박영효(朴泳孝) 수신사가 주선하였다.
11월 12일
선혜청의 화재로 아사와 고사(庫舍) 등 111칸을 태우고 곳간에 보관 중이던 전(錢) · 목(木) · 은(銀) 등이 모두 불탔다.
11월 29일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을 내병조(內兵曹)에 설치하고 내병조를 호위청(扈衛廳)에, 호위청을 요금문내(曜金門內)의 공해에 옮기게 하였다. 신식 아문의 설치가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고종 20년(1883)】
1월 23일
사섬시(司贍寺)의 혁파가 있었다. 권초각(捲草閣)만 남겼다.
4월
삼청동에 북창(北倉)을 설치하고 청(淸)의 천진(天津)에서 초빙한 공장(工匠)으로 하여금 신식 군기(軍器)의 제조를 의뢰했다.
7월 5일
북창동에 전환국(典局)을 설치
7월 15일
저동(苧洞)에 신식 인쇄기를 설치한 박문국(博文局)을 열었다.
11월 15일
시전의 실화(失火)로 개건(改建)이 어렵게 되자 나라에서 내하전(內下錢) 일만 냥과 선혜청목(宣惠廳木) 이십 동을 조급(助給)하였다.

【고종 21년(1884)】
3월 14일
기기국(機器局)의 번사창(飜沙廠) 창건 공사의 정초일(定礎日)을 15일로 정하였다.
7월 22일
옥동(玉洞)에 친군영(親軍營)의 병영(兵營)을 신건(新建)하고 연융대(鍊戎臺) 이주의 병사들을 머물게 하였다.
8월 24일
좌포청(左捕廳)의 사관청(仕官廳)이 무너졌다.
10월 17일
우정총국(郵征總局)의 낙성(落成)이 있었다.
11월 18일
경기감영(京畿監營)에 일본 병정들이 주둔하다.

【고종 22년(1885)】
1월 10일
구수어청(舊守御廳) 고사(庫舍) 12칸 가가(假家) 14칸 저유목물(儲留木物)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2월 18일
북부 재동(齋洞)에 광혜원(廣惠院)을 설치하고 학생들을 모집하여 서양 의학을 가르쳤다.
3월 12일
광혜원을 제중원(濟衆院)으로 바꾸고 여병원(女病院)을 병설하였다.
3월 24일
기연해방아문(畿沿海防衙門)을 용산방(龍山坊)의 만리창(萬里倉) 터에 옮겼다.
3월 28일
갑신정변에 박문국이 파훼(破毁)되었으므로 광인사(廣印社)로 옮겼다.
5월 2일
생민동(生民洞)에 평안병영(平安兵營)의 병사들이 상경함에 따른 친군서영병사(親軍西營兵舍)를 신축하였다.
6월 19일
내무부(內務府)의 처소를 선혜관청(宣惠官廳)으로, 선전관청(宣傳官廳)을 충의청(忠義廳)의 전내국방(前內局房)으로, 충의청(忠義廳)의 처소는 내병조(內兵曹)의 서쪽으로 이접(移接)하였다.
8월 17일
전환국의 조폐기기창(造幣機器廠)을 선혜청별창(宣惠廳別倉)에 설치하였다.(남대문 밖 단층의 신식 건물)
10월 22일
친군우영별초(親軍右營別抄)의 신영병사(新營兵舍)가 준공되었다.

【고종 23년(1886)】
2월 7일
준천역(濬川役)을 시행하였다.
5월 22일
전환국을 기기창(機器廠)에 합설(合設)하였다.

【고종 24년(1887)】
9월 2일
실화로 종루 각 전(廛)이 거의 소신(燒燼)되었다. 이웃의 살림집들도 연소(延燒)되어 피해 막심하였다.
9월 4일
2일의 화재 복구를 위해 내하전(內下錢) 십만냥과 선혜청목(宣惠廳木) 오십 동(同)을 조급(助給)하여 복구하도록 하였다.
10월 11일
호조의 별례방(別例房) 20여 칸이 불에 탔다.
10월 28일
전환국 조폐창과 기기국(機器局) 기기창(機器廠)이 준공되었다.
12월 25일
연무공원(鍊武公院)을 설치하였다.

【고종 25년(1888)】
2월 13일
친군영(親軍營)의 관문각(觀文閣)을 개건(改建)하였다.
10월 9일
생화고(生花高) 주전소(鑄錢所)

【고종 28년(1889)】
3월 29일
준천역(濬川役)을 시행하였다.
12월
제약소(製藥所)를 새로 지었다.


【고종 29년(1890)】
10월
전환국 청사를 완성하였다.

【고종 30년(1891)】
3월 4일
준천역(濬川役)을 시작하였다.
5월 18일
경리청(經理廳), 북한행궁(北漢行宮) · 공해(公) ·성첩(城堞)의 중수(重修)와 보축(補築)을 완료하였다. 준천역(濬川役)을 끝냈다.

【고종 31년(1892)】
6월 28일
중앙 관제를 개혁하였다. 태복시(太僕寺)와 전각사(殿閣司)는 선공(繕工)을 관장하고 공무아문(工務衙門)은 국내 일체의 공작영선(工作營繕)의 일을 맡게 되었다.
12월 27일
경무청(警務廳)의 처소가 좁아서 육영공원으로 옮기고 공원(公院)은 전보국(電報局)으로, 전보국은 경무청 자리로 옮겼다.

【고종 32년(1893)】
3월 13일
계동(桂洞)의 직조국(織造局)을 일본어 학당으로 이용하게 하였다.
7월 15일
칙령(勅令) 제140호로 각처의 병영과 수영(水營) 소속의 공해들을 폐지하고 지방 관청에 이속시켜 탁지부(度支部)가 관리하게 하였다. 또 칙령 141호와 142호로 각 진보(鎭堡)를 폐지하고 소속의 해사(舍) 등을 지방 관청에 이속시켜 탁지부가 총괄하도록 조치하였다.」

일제 강점 이후 총독부가 들어서면서 의식적으로 구아사(舊衙舍)들은 무시되어 차츰 전용되거나 훼철(毁撤)되고 만다. 그나마 6·25전쟁으로 인하여 황폐되고 도시 발전의 명목으로 철거되어서 구관아 건축물들은 지금은 거의 대부분이 원위치에서 이건(移建)되어 있으며 현존한다 해도 이름나서 알려진 것은 불과 수동(數棟)뿐이다.
한성부 관아 건물의 이와 같은 상황은 지방 관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고서에 등재되어 있는 아사들을 찾아보기가 지극히 어렵다. 겨우 몇몇 고을에서 단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삼국시대 이래로 역대에 걸쳐 수많은 아사가 이 땅에 있었을 것이나 이제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은 거의 볼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00년을 넘어선 시대의 건물도 그렇게 흔한 편이 아니다.
그래도 지방에는 궁실(宮室)에 속한다고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공해조(公條)에 수록되어 있는 객사(客舍)의 유(類)가 남아 있어 300여 년의 나이를 읽을 수 있다. 이들로 미루어 조선시대에도 도성내 관아 건물이 어떠한 형상을 하였던 것인가를 미루어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