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문원지(承文院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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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세종 15년(1433) 7월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 등이 북부 양덕방(陽德坊)의 승문원터가 도성의 주맥(主脈)이므로 창덕궁을 이 곳으로 이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세종은 중신들을 남산에 올라가 살피게 하고 왕은 친히 북악산 중턱에 올라가 지세를 살피다가 봉황암[鳳凰岩, 일명 휴암(?岩)]으로 내려가 승문원터 일대를 살피기도 했다. 그러나 승문원터는 도성의 주맥이 아니고 명당이 협소하다는 결론에 따라 승문원터에 궁궐을 짓는 일은 논의하지 않게 되었다. [註]
승문원은 외교 관계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던 관아였다. 괴원(槐院)이란 별칭을 가진 승문원은 조선초 태조 때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라 하던 것을 태종 10년(1410)에 승문원으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