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지(六曹址)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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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조는 오늘날 세종로 좌우에 관아가 있어서 이 곳을 ‘육조전(六曹前) 거리’라 칭했다. 즉 조선초에 경복궁이 본궁(本宮)으로 낙성되자 경복궁 앞 거리와 그 부근을 중심으로 의정부와 이조 · 호조 · 예조 · 병조 · 형조 · 공조 등의 육조 및 그 예하 관서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6조는 대개 고려조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오늘날 정부의 각 부처와 같이 행정 업무를 분담하였다.
6조의 청사가 신축된 시기는 천도 후 3년이 지나 준공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註]
이들 육조의 청사는 처음 건립할 때 축대가 없었으므로 장마철이 되면 도괴할 위험이 있었다. 이에 태종은 병조의 보충군을 동원하여 청사 주위를 둘러 쌓아서 견고하고 안전하게 하였다. [註]
조선 건국초에는 6조가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장관인 전서(典書)는 정3품으로서 직위가 낮을 뿐 아니라, 도평의사사(都平議使司)의 재추(宰樞)가 모든 국정을 처리하였기 때문에 미미한 기구였다.
이방원이 정권을 장악한 정종 때 관제를 개혁하여 의정부 · 육조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 후 태종 1년(1401)의 관제 개혁 때에도 6조의 권한이 미약하여 6조의 전서(典書)는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또 6조의 서열도 이 · 병 · 호 · 형 · 예 · 공조의 순서로 정해져 있었다.
이에 태종 5년(1405) 정월에 종래 사평부(司平府) 소관의 전곡(錢穀)의 회계를 호조로, 승추부(承樞府) 소관의 군무(軍務)를 병조로, 숭서사(崇瑞司) 소관의 문관 인사권은 이조로, 무관 인사권은 병조로 이관시키고 의정부 소속 관사(官司)를 이조에 속하게 했다. 그리고 6조의 전서를 판서(判書)로 개칭함과 동시에 정2품으로 승격시키고 보좌관(補佐官)으로 좌우참의(左右參議)를 두어, 6조의 격을 높이고 권한을 크게 강화하였다. [註]
6조에는 판서를 비롯한 참판(參判, 종2품), 참의(參議, 정3품)가 있어 이를 3당상(三堂上)이라 하는데 병조에는 참지(參知, 정3품)가 있었다. 그 밑에 낭청(郞廳)이라고 칭하는 실무에 종사하는 정랑(正郞, 정5품), 좌랑(佐郞, 품)이 각각 3명씩 있었지만 병조와 형조만은 4명을 두었다.
이 밖에 호조와 병조에는 수학과 법률을 전담하는 산학교수(算學敎授, 종6품), 율학교수(律學敎授, 종6품) 등의 기술관을 각각 9명씩 두었다.
또한 6조에는 사(司)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사무를 분담했는데 각 사(司)는 낭관(郞官)이 주관하였다.
여기서 6조의 청사 구지(舊址)와 관장 업무를 약술하고 청사 구지가 알려진 예하 관서만 소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