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아 유지(遺址)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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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년 간 조선왕조의 수도였던 한성부는 조선왕조 특유의 의정부 · 6조 체제의 관제(官制)에 따라 문 · 무관직의 공서(公署)가 자리잡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 이래 조선말까지 관제가 수차 개혁됨으로써 많은 공서가 생성되거나 소멸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관제 개편 외에 역대 왕에 따라 경복궁은 몰론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의 5대 궁궐을 번갈아 사용한 관계상 왕궁의 정문 앞을 중심으로 관아가 배열되었기 때문에 관아의 위치가 자주 변동되어 당시의 청사구지(廳舍舊址)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또한 임진왜란, 이괄(李适)의 난 등의 전란시에 많은 관아가 소실되어 이를 후에 복구했지만 그 위치는 변동되었을 것이다.
전기(前記)한 이유 외에도 조선왕조의 중앙 행정 기관이 자리잡았던 오늘날의 서울 강북 지역은 일제의 35년 간 강점으로 왕궁은 물론 성곽, 문루(門樓) 그리고 많은 관아 건물이 훼손되어 옛모습을 더욱 찾을 수 없게 되었다.
6·25전쟁 전만 해도 서울 지역에는 조선왕조 때의 관아로서 퇴락한 청사가 몇 개 잔존해서 그 형해(形骸)를 볼 수 있었으나 그간 도시계획에 따라 계속 훼손되어 현재에 와서는 종로구 소격동 165번지의 종친부(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호), 종로구 견지동 397번지의 우정국 건물 일부(사적 제213호), 중구 남대문로 1가 19번지의 광통관(廣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