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칭호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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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역의 지명은 삼국시대부터 문헌에 보인다.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3국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금의 서울지역이 마한(馬韓) · 진한(辰韓) · 변한(弁韓)의 3한 중 마한에 속하였던 것은 여러 문헌자료에 의하여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마한 54소국 중 어느 소국이 지금 서울지역에 위치하였던 것인지는 아직까지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는 초기부터 지금 서울지역의 명칭이 보인다. 즉 『삼국사기』 백제본기중 시조 온조왕 기사(記事)를 보면,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 · 온조(溫祚) 형제가 졸본부여에서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남행하여 한산에 와서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거주할 땅을 보았으며 비류는 미추홀(彌鄒忽, 지금의 인천지방)로 가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하여 백제를 건설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보이는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 위례성(慰禮城)이 모두 지금의 서울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온조왕 기사 중에는 또 13년(B.C. 6)에 왕이 한수 남쪽을 순시(巡視)하고, 그곳이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면서, 한산 아래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긴 다음, 궁궐을 짓고, 이듬해 천도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보이는 한수는 지금의 한강, 한산은 지금의 남한산을 말하는 것이니, 백제의 수도가 이 때 한강 북쪽 위례성에서 한강 남쪽 남한산 아래로 옮겨 갔던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이상에 보이는 기록에 의하여 삼국시대 초기에 지금의 서울지역은 한산 · 위례성 등의 지명으로 불려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하여 이 지역은 고구려의 북한산군 · 남평양으로 되었으며, 신라 진흥왕 때(540∼575)에는 북한산주로 되고, 신라 통일 후 경덕왕 때(742∼764)에는 한양군으로 고쳐졌다.[註8] 그중 위례성의 지명은 목책 즉 우리, 울을 의미한 것으로 보여지며, 한산은 남한산의 대칭으로 불리던 북한산의 원명 한산 · 한뫼에서 연유된 것임은 물론, 한양은 한산의 남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초에는 지금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양주를 설치하였는데, 이 때 양주는 해주와 함께 관내도에 속한 좌 · 우 2보의 신책군(神策軍)으로 상당히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으며, 또 광릉(廣陵)이라는 별호로 불리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문종 12년(1067)에는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하니, 이것은 지금의 서울지역이 남쪽의 서울 즉 도읍지의 일반적인 명칭으로 불리게 된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숙종 6년(1101)에는 정작 천도를 위하여 남경에 시설을 갖추기도 하였다.
그리고 몽고의 대전란을 치른 후 충렬왕 34년(1308)에는 다시 통일신라 때의 한양군명을 취하여 한양부로 고쳐서 여말까지 이르렀다.[註9]
한편 근세조선의 개국 전도(奠都)와 함께 태조 4년(1395)에는 종전의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쳤다. 그런데 이 한성의 지명도 실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불리던 것으로서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개루왕 5년(132)에 북한산성을 쌓았다 하고, 분서왕(汾西王) 4년(301)에는 내신좌평(內臣佐平) 우복(優福)이 북한성을 근거지로 삼아 모반하였다 했으며, 또 백제본기 중 침류왕의 원자 아화왕(阿華王)이 한성 별궁에서 탄생하였다 하고, 아화왕 4년(395)에 왕이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친히 군사 7천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靑木嶺) 아래에 머무는데 마침 큰 눈이 내리고 사졸이 많이 동사하므로, 회군하여 한산성에 이르러 군사들을 위로하였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이상 백제사에서 보이는 북한산성 · 북한성 · 한성 · 한산성은 그 사실 내용으로 보아서 모두 동일의 지명인 시조 온조왕기에서 보이는 부아악(負兒岳)[註10]이 있는 한성지방을 의미함이 틀림 없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한산이 있는 곳임으로 하여 산명 그대로 지명도 한산이라 불렀으며, 온조왕이 위례성을 설치함으로 인하여 위례의 명칭이 따로 생기기도 하였지만, 개루왕 5년에 한성에 성을 쌓은 다음에는, 이미 도읍을 옮긴 곳인 남한산성의 대칭으로 이곳에 쌓은 성을 북한산성으로 부르고, 그 지명도 북한산, 북한성 또는 한산, 한성으로 혼용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의 건국과 함께 종전의 한양을 한성으로 고친 것은 역시 전부터 일반적으로 불러오던 지명을 인용한 것이고, 새로 지은 것은 아니며, 또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구왕조(舊王朝) · 구도읍지(舊都邑地)에 대신하여 새 왕조(王朝) · 새 도읍(都邑)을 건설하여 가던 시기인 만큼 전 왕조시대의 명칭인 한양을 한성으로 바꾼 것 뿐이었다. 그런만큼 제도상의 명칭이 한성부로 된후에도 전의 명칭인 한양 역시 서울의 한 명칭으로 남아 널리 일반에게 애칭되었음을 볼 수 있다. 서울의 역사, 풍물 등을 가사(歌辭)로 엮은 '한양가'를 위시하여, '한양 천리 머나먼 길……', '한양간 낭군……' 등의 속요(俗謠) 구절 같은 것도 그 일례인 것이다.
한편 한성부 다음에 있었던 경성부의 경성 또한 새로이 지어진 이름은 아니었다. 이미 신라 때에 서울의 성곽을 경성이라 하고 그 경성을 수축 개작하는 관서로 '경성주작전'이라는 관서가 있었던 것이다. 또 종래 수도를 중심으로 하는 성곽은 수도 즉 서울의 방위시설, 경역을 이루었던 만큼 경성의 칭호는 서울의 성곽만이 아니라, 수도 서울 전체를 의미하는 명칭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따라서 『동국여지승람』에서 그 예를 보더라도 경도 성곽조에서는 태조 5년(1396)에 창축하고 세종 4년(1422)에 개수한 주위 9,975보의 서울 성곽을 '경성'으로 적고, 그 아래에는 다시 '궁성=경성의 중앙에 있다' '종묘=경성 안 동쪽 연화방에 있다'[註11]고 하였으며, 한성부 산천조에서도 삼각산을 경성의 진산이라 하고, 서울의 성곽을 경성이라 하여, 그 경성을 수도서울 전체의 명칭처럼 적고 있음을 볼 수 있다.[註12] 따라서 경성은 서울의 성곽 명칭을 겸한 경도의 명칭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통칭되었던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최근세 구한국시대에 있어서는 서울의 제도상 명칭인 한성부가 그대로 존속되는 중에도 일간신문의 보도기사나 문인들의 일기 등에서는 서울을 한성보다도 경성으로 많이 썼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 중에서 서울에 관한 논술을 보더라도 '온조왕이 졸한 후 110년에 처음으로 북한산성을 지었는데, 곧 지금의 경성 북방이다'[註13] '북위례의 고지는 지금 경성 동북쪽 10리의 지, 삼각산 동록(東麓)에 있다'[註14] '한성이란 것은 백제 개루왕이 개척한 것으로서 지금 경성의 한양동이 곧 그 고지이다'[註15] 등과 같이 경성을 그대로 서울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니 경성이라는 서울에 대한 호칭 역시 한양 · 한성과 같이 그 유래가 오래였고, 또 경성부 이전에 벌써 널리 서울의 지명으로 불려 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