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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끼고 그 남북에 위치한 지금의 서울지역은 아득한 옛날부터 선인들의 생활의 터전, 문화의 발상지가 되었다. 강의 양안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석기시대의 유물들이 이미 내외 학자들로 하여금 깊은 관심을 갖게 하여 오는 바 이지만 특히 성동구 왕십리 응봉에서 발견된 무문토기인의 주거지, 강동구 암사동에서 발견된 원시농경시대의 주거지 등은 이 지역이 선사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의 집단생활처가 되어 왔음을 여실히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오랜 기간에 걸친 집단생활의 계속은 그것이 비록 느렸지만 이 지역의 선진적인 발전을 가져 왔던 것으로,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가 이곳을 중심으로 도읍을 설치하고 나라를 세웠던 것도 다만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백제의 처음 도읍지는 지금 삼각산하의 강북 위례성이었지만, 얼마 후에는 강남으로 그 도읍지를 옮겼다. 그러나 하(강)북 위례성과 하남 위례성이 있고, 북한산, 남한산과 북한성, 남한성의 명칭이 문헌상에 보이는 것처럼 백제는 강북에서 강남으로 도읍을 옮긴 다음에도 강북의 구도(舊都)를 중시하고 수시로 수즙(修葺) · 보완(補完)에 유의하였으며 또 때로는 강북의 북한성으로 옮아 있기도 하였던 것으로서, 지금의 서울지역은 그대로 도읍지로 또는 국방요지로 중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건국 후 400여 년, 고구려의 영주(英主)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계속하고, 백제의 21대 개로왕(455∼475)의 패전과 뒤를 이은 문주왕의 남천으로 서울지역은 고구려의 통치권내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당시 남북으로 국력을 확충하던 고구려는 이곳에 북한산군을 설치하고, 또 이를 남평양으로도 호칭하게 되었다. 평양을 수도로 하던 고구려는 이 서울지방을 남쪽의 한 도읍지 또는 백제 · 신라를 제압하는 거점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광개토왕 · 장수왕대의 고구려 남진정책에 대하여 백제 · 신라가 공동전선을 펴게 되면서 정세는 차츰 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신라의 24대 진흥왕(540∼575) 때에는 백제와의 연합작전으로 고구려의 세력을 지금의 서울지역에서 몰아냈으며, 진흥왕 16년(555)에는 왕이 북한산에 친행(親幸)하여 강역을 정하고 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이로부터 서울지역은 신라의 대북방 방어진지 또는 전진기지로서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후 고구려에서는 다시 이 지역의 탈환을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이곳 북한산성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이렇다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註16]
그리고 신라 통일 이후 이 지역이 한양군으로 되었는데 한양군은 신라 9주 중의 하나인 한주(漢州, 지금의 광주) 소속으로서 황양현(荒壤縣, 양주 풍양)과 우왕현(遇王縣, 고양 행주)을 영현으로 하였다.[註17]
한편 신라 말기 효공왕 2년(898)에는 후고구려를 자칭하는 궁예가 한주 관내의 30여성을 공략함에 따라 서울지방은 일시 궁예에게 돌아갔으며, 태조 왕건이 궁예의 뒤를 이어 고려조를 창건함과 동시에 고려의 남방경략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그리고 고려의 국기가 안정됨과 함께 지명을 양주로 고쳤으며, 성종 14년(995) 전국을 10도, 12주 절도사로 할 때에는 광주, 황주, 해주와 함께 양주는 관내도 관내 4절도사의 하나가 되었을 뿐 아니라, 좌신책군(左神策軍) 칭호로 우신책군(右神策軍)인 해주와 함께 경기에 대한 좌 · 우보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종 3년(1012)에 절도사 및 좌 · 우보의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절도사의 직제는 안무사(按撫使)로 바뀌었으며, 9년에는 다시 양광도의 양주지주사로 되었다.[註18]
그런데 고려의 11대 문종조에 양주지주사가 남경유수관으로 승격되면서 지금의 서울지방은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즉 문종 21년(1067)의 남경 설치는 태조 때 고구려 구도(舊都) 평양에 설치한 서경, 성종 6년(987)에 신라 고도(故都) 경주에 설치한 동경에 이어 세 번째 설치한 지방 경도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큰 것이었다.
문종 때의 남경유수관 설치 및 남경 신궁 건설에 대하여 『고려사』지리지 남경유수관조에서는 문종 21년에 양주를 남경 유수관으로 삼고, 인근 군현의 백성들을 옮겨 충실히 하였다고 기록하고, 문종세가 22년조에서는 이 해에 신궁을 남경에 창건하였다고만 기록하여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문종의 이러한 남경 설치는 그가 일찍이 풍수도참설을 믿어 그의 10년에 정주(貞州, 지금의 개풍군)에 장원정(長源亭)을 짓고 국가기업의 연장을 기원하였으며, 16년에 서경 즉 평양에 좌우궁(左右宮)을 짓고 길운이 올 것을 기대하였던 바 있으며, 또 훗일 김위제(金謂)가 숙종에게 상서하여 남경천도를 건의한 가운데 개국 후 160년에 삼각산으로 제경을 삼으면 9년 만에 사해가 와서 조회한다는 『도선기(道詵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註19] 풍수도참설에 의한 바가 없다고는 못할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고려조에서는 앞서도 고구려 · 신라의 고도인 평양과 경주를 이미 서경(西京) · 동경(東京)으로 승격하였던 만큼 백제의 고도이며 중심지이던 한양(양주)을 남경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에 서경, 동경과 함께 남경을 설치하여 수도 개경 외에 세 곳을 별경(別京)으로 한다는 것은 고려조가 삼국의 전통을 함께 계승하고 또 민심과 국력의 단합 · 강화를 가져오는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곳이 산수와 풍경이 좋고 국내 중앙에 위치하여 교통이 편리하며 여기에 다시 풍수도참상으로도 좋은 곳이라는 설이 있음에랴? 문종의 남경 건설이 있은 후 30여 년을 지난 숙종 6년(1101)에는 다시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이라는 임시 관서를 설치하고 남경의 건설공역을 크게 진행시켰다. 이보다 앞서 원년에 이미 음양관(陰陽官)인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에 의한 남경천도설이 제기된 바 있었으며 4년 9월에 왕은 재신(宰臣)과 일관(日官) 등에게 남경 건설관계를 의논하게 하고, 뒤이어 친히 왕비 · 원자와 여러 관원들을 데리고 삼각산 밑으로 와서 도읍지로 정할 만한 곳을 간심(看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확실한 결정은 보지 못하였으며, 6년 9월에야 정식으로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최사추(崔思諏), 어사대부(御史大夫) 임의(任懿),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 등으로 다시 현지답사를 하게 하였는데 이 때 최사추 등은 노원, 해촌, 용산 등 여러 곳으로 새 도읍지의 중심이 될 만한 곳을 두루 찾아보다가 결국 삼각산 면악(面嶽, 北岳)의 남쪽 임좌병향(壬坐丙向)의 땅을 궁궐터로 정하고, 그곳을 중심으로하여 도읍을 건설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고하여, 왕의 허가를 얻었고, 종묘와 사직 · 산천에 남경 건설을 고제(告祭)하니, 여기서 새 도읍지 남경의 건설은 시작되었으며, 이듬해 봄에는 중서문하의 주청에 의하여 도시구역도 동쪽은 대봉(낙산) 남쪽은 사리(용산의 사평도), 서쪽은 기봉(岐峰, 鞍峴), 북쪽은 면악(북악)에 이르기까지를 구획하여 정하였다.[註20] 이보다 30여 년 전 문종조의 남경건설은 군을 유수관으로 승격함과 함께, 거기에 상응하는 시설의 증가가 있었지만 신궁의 규모 등이 그렇게 큰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숙종조의 이러한 대규모적인 건설공역은 약 3년간에 걸쳐 대략 성취를 보았던 것으로서 9년 8월에는 왕이 많은 대신 · 내관들을 대동하고 남경에 친행하여, 대사(臺), 원유(園)를 유람하고, 조하를 받으며 여러 신하들을 연회하고 또 불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작 천도까지는 이르지 않고 9월에 장원정을 거쳐 개경으로 돌아갔는데, 처음 김위제의 상서중에도 『도선기』 중에 중경(송악, 개성), 남경(목멱양, 서울), 서경(평양) 3경에 년중 4개월씩 유주(留駐)하면, 36국이 와서 조회한다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우선은 순주(巡駐)의 도읍지로 예정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註21]
숙종이 재위 10년으로 승하한 후 예종, 인종도 수시로 이 남경에 행행하고 또 연흥전에서 군신의 조회를 받으며 연회, 불사가 있은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그러나 인종 6년(1128)에 남경 궁궐에 화재가 있고 이듬해 남경의 대화궁을 크게 지으면서부터 남경의 면모는 전과 같지 못하였다.
한편 의종 이후로는 무신들의 전권 및 몽고의 침입으로 인하여 남경, 서경 등의 건설, 순주 같은 일은 염두에도 둘 수 없게 되었으니, 그동안에 남경도 황폐하게 되었을 것은 물론이지만, 친몽외교로 정세가 고식적인 안정을 본 다음 충렬왕 34년(1308)에는 지방제도도 남경유수관에서 한양부(漢陽府)로 고쳐지게 되었다. 충렬왕 때 남경유수관을 한양부로 고친 후 약 50년간은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공민왕 때(1352∼1374)부터는 대륙방면에서 원 · 명의 세력이 대립하고 왜적의 침략이 심하여짐과 함께 다시 천도문제가 대두하여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이 그 후보지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동안 의존하여 오던 원제국(元帝國)의 기반(羈絆)을 이탈함과 함께 관 · 민간에 위구(危懼)의 생각을 가지는 경향이 있었던 데에도 연유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 중에도 공민왕 5년에 원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혁파하고 류인우(柳仁雨)를 보내어 99년간 원에 빼앗겼던 쌍성(雙城, 永興) 등의 땅을 수복하고 인당(印)을 보내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 8참(站)을 공격하게 하여 파사부(婆娑府) 등 3참을 점령하고 원의 지정(至正) 연호의 사용을 금지함과 함께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진영서(陳永緖)를 남경 즉 한양에 보내어 도읍지를 간심하게 하였는데, 인심이 동요하여 남부여대하고 남쪽을 향하여 떠나는 자가 저자로 나가듯이 밀렸다 하니 이것은 민심동요의 실정을 잘 말하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註22]
따라서 이 때 공민왕의 한양천도 계획은 승 보우의 한양에 도읍하면 36국이 내조(來朝)한다는 도참설에 의거한 건의같은 데도 연유된 바 있고, 또 천도에 의하여 중흥사업, 혁신정치의 실현을 생각한 바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륙의 강대세력과 대립관계에 있는 현실에서는 개경보다 조금 남쪽인 한양에 새 도읍지를 정하여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고, 또 인심을 수습 안정시키려는 데에 더 유의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註23]
그러나 내우외환이 계속되는 중에서 공민왕은 한양에 궁궐을 수즙 건축하는데에 그치고, 천도의 실현을 보지는 못하였다. 다만 5년, 6년에 한양 궁궐의 수축이 있은 후로는 '한양', '한양군'의 칭호가 '남경' '남경유수'로 바뀌어 『고려사』 동왕 세가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서울지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뒤를 이어 우왕 때에도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있는 홍건적, 왜적의 침입과 함께 모든 것이 개경에 정도한지 오래되어 지기가 쇠하였기 때문이라는 의논이 자주 일어나, 여러 곳으로 도읍을 옮길 만한 곳을 찾기도 하다가 8년(1382)에는 정작 한양천도를 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여러번 서운관원 등의 한양천도 건의가 있었지만 대신, 간신(諫臣) 등의 반대로 그때 그때 중지 되었으며, 이 해 9월에도 배주태수(白州太守) 홍순(洪順) 같은 사람은 남경의 진산인 삼각산이 화산이니 동방 목성국(木性國)의 도읍지로 부적당하다는 음양학적 이유를 들어 반대한 바 있었지만 왕은 해를 이어오던 숙원을 기어이 실천에 옮겨 궁녀들에게 이장포(理裝布) 5천필을 주어 행장을 차리게 하고, 시중(侍中) 이자송(李子松)으로 개경에 유수하게 한 다음 개성을 떠나 한양으로 옮겼다.
그런데 이 때의 천도는 사전에 이렇다 할 준비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해 8월에 이를 결정하고 9월에 실행하였던 것인만큼 한양에 새로운 궁궐 · 관아 등의 설비가 없었기 때문에 관아나 관원들의 주거가 모두 천막이 아니면 민가를 점령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해 겨울을 지나는 동안에는 고난과 민폐가 적지 않았으며, 여기에 다시 종묘, 사직과 여러 관서가 대개 개경에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듬해 2월에는 다시 구도(舊都) 개성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한양을 중시하고 또 천도의 후보지로 생각함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으로서 13년 겨울에 한양산성의 수축을 의논하면서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 우인열(禹仁烈), 판밀직(判密直) 홍징(洪徵)을 한양부로 보내어 중흥산성(북한산성)의 형세를 살펴보고, 이듬해 봄에는 최영(崔瑩)과 함께 요동정벌을 밀의하면서 경성(개경)의 방리군을 동원하여 한양의 중흥성을 수축하였는데,[註24] 우왕 때의 이러한 계획과 설비는 대륙방면의 정세가 예측을 불허하는 당시에 있어서 한양천도 준비와 함께 한양을 제2의 방어거점으로 삼으려는 데에도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공민왕 2년(1390)에도 한양천도가 있었다. 그런데 전에 천도설이 제기될 때에는 대개 도참비기(圖讖秘記) 중의 송도 지덕이 쇠하였다거나, 한양에 도읍하면 여러 외국이 와서 조회하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로 거론되었지만, 이번에는 송경(松京)은 인군을 폐축(廢逐)하는 땅이라는 이유가 한가지 더 붙었다.
즉 2년 7월에 왕이 평리(評理) 배극렴(裵克廉)을 양광도찰리사(楊廣道察理使)로 임명하여 한양 궁궐을 수리하게 하며 천도 준비를 할 무렵 좌헌납(左獻納) 이실(李室)이 상소하여 참위설(讖緯說)을 믿고 한양에 천도하는 것이 불가한 일인데 더구나 추수 전에 천도하여 인마가 모두 짓밟아 놓으면 민원이 일어날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이 때 왕은 이실에게 '비록(秘錄)에 이르기를 만일 옮기지 않으면 군신을 폐한다고 하였는데 네가 어찌 홀로 불가하다 고집하느냐?'고 힐책하였다. 9월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 문하평리(門下評理) 윤호(尹虎)로 송경에 유수하고 각 관부를 나누어 송경에 분사(分司)를 설치하여 일을 보게 한 다음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註25]
공양왕 때에 이렇게 송경은 군신을 폐축하는 땅이라는 비록의 설이 천도의 이유로 제기되었던 것은 공양왕 직전에 우왕, 창왕의 폐출이 있던 데에서 연유하였던 것이다.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불의 옹립되고 또 우왕, 창왕과 많은 대신들이 구축된 것을 목격한 공양왕으로서는 특히 절감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유약무능한 성품의 인물인 그로서도 이 천도에 대하여서만은 여러 사람들의 반대를 배제하고 적극적으로 나왔던 것이다. 또 공양왕 때의 한양천도는 다른 어느 때의 천도보다도 격식을 갖춘 것으로서 각 관서를 나누어 일부는 구경(舊京)에 두고 일부는 신경(新京) 즉 한양에 설치하게까지 하였던 것이니 이야말로 신도 한양이 새 도읍지로서의 정식 출발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양광도관찰사 류구(柳)가 채붕(彩棚)을 설치하고 백희를 연출하며 천도 입경하는 일행을 맞을 준비를 하였던 것도 그 일이 중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도에 옮긴 지 반년간 관서(官署)가 양분되어 서정(庶政)의 체계가 서지 않고 관민의 불평도 적지 않을 뿐더러 또 피화길지(避禍吉地)라고 하는 한양에서도 자주 호환(虎患)이 생기고, 심지어는 큰 호랑이가 신도 문하부 관아에 뛰어 들어 사람을 물어가기까지 하며, 한편으로는 정부 당로자(當路者)에 대한 모해사건도 일어나는 등 인심을 불안하게 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였기 때문에 이듬해 즉 공양왕 3년 2월에 왕실과 정부는 다시 구도 송경으로 돌아가니[註26] 이것은 조선 태조 3년 한양천도 3년 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