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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 말기에 군(軍) · 정(政) 대권을 장악하였던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한 것은 고려 공양왕 4년(1392) 7월 17일이다. 이날 군신의 추대로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한 태조는 진작부터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려 하였다.
즉 그해 8월 13일에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길 것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하고 15일에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 이염(李恬)을 한양부로 보내서 궁궐을 수즙케 하였던 것이니[註27] 조선의 한양천도 준비는 이미 조선왕조의 창건과 함께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해 9월초에 시중 배극렴, 조준 등이 태조가 임시 행행하여 있는 평주(평산) 온천으로 가서
「생각컨대 한양에 궁궐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성곽이 완전하지 못하니 호종(扈從)하는 사람들이 민호를 빼앗아 거처하면 날씨는 추워지는데 백성들이 갈 곳이 없게 됩니다. 궁실 · 성곽이 영축되기를 기다려서 천도하기 바랍니다.」
라고 아뢴데 대하여,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기어 급히 서둘던 천도를 중지하였다.[註28]
그러면 조선의 건국과 함께 태조가 천도를 급히 서두른 이유와 그 천도지를 한양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첫째로는 신왕조의 개창과 함께 도읍지를 옮겨 군신 상하의 심기일전을 꾀하였던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태조 자신이 후에 계룡산으로 다시 도읍지를 보러가는 도중에서 '옛부터 역성수명(易姓受命)의 임금은 반드시 도읍을 옮겼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다음 태조가 고려조의 구경(舊京) 개성을 떠나려한 이유로는 고려조 후반기에 와서는 자주 개성의 지기가 쇠하였다는 말이 있었고 더구나 송도는 폐군신지지(廢君臣之地)라는 음양설(陰陽說)에 관련하여 자신의 그러한 사실이 있을 뿐 아니라, 그곳에는 고려왕조의 구세력이 반거하고 있으며, 또 태조에 의하여 고려왕조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기도 한 만큼 심리적으로 불안감을 가졌던 데에도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새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게 된 것은 한양은 이미 고려조에 있어서도 남경의 설치는 물론 말기에도 자주 한양시설, 한양천도가 있었던 것처럼 한양은 이미 오래전부터 대다수의 관민들 간에 천도지로 인정되어 왔기 때문이었던 것이다.[註29]
따라서 태조가 2년 2월 정당문학(政堂文學) 권중화(權仲和)의 계룡산길지설에 따라 일시는 계룡산을 간심하고 신도의 건설계획을 진행하기도 하였지만, 그곳이 지리적으로 남쪽에 치우치고 또 풍수학적으로도 불길하다는 하륜(河崙)의 상언에 의하여 폐기되고, 이듬해에는 다시 여러 중신들과의 친심회의(親審會議)로 백악 남쪽 지금의 서울 성곽 안을 중심으로 하는 새 도읍지를 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즉 태조 3년 9월부터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신도 건설계획을 진행하는 한편, 10월(음)에 우선 한양천도를 단행하고, 뒤이어 종묘, 궁궐, 관아, 성곽 등 여러 시설을 갖추니 여기서 한양전도는 정작 실현을 보았으며, 4년에는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치기도 하였다.
그런데 태조의 이러한 강행천도에 대하여는 고려의 중신 대가(大家)는 물론 일반 관민들 간에도 처음부터 새 도읍지 이거에 난색을 보이는 경향이 있었으며, 여기에 다시 태조 7년에는 왕자의 난이 일어나 신도에서 왕실과 정부를 중심으로 한 살륙의 변이 있었고 태조의 뒤를 이은 정종은 자주 나타나는 변괴(變怪)를 피하여 원년 3월에 각 관서의 인원을 절반씩 나누어 데리고 개성 유후사(留後司)로 나가게 되니 천도한지 얼마되지 아니한 신도 한성에는 불안하고 황량한 기운이 감돌게 되었다. 더구나 천도 후 4년간에 신덕왕후 강씨를 잃고 사랑하는 아들 방번(芳蕃), 방석(芳碩, 세자) 등을 잃은 다음 다시 고려조의 구경 개경을 향하여 떠나게 된 태조의 심정은 형언하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정종 원년 3월 태상왕의 몸으로 서울을 떠날 때에는 신덕왕후의 정릉을 지나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차마 떠나지 못하면서 '처음 한양으로 옮긴 것은 나의 뜻만이 아니고 국인들과 의논해서 한 것이다.'라고 하며, 천도 당시의 일을 회상한 것이라든가, 개성으로 간 다음 '내가 한양에 천도하여 왕비와 아들을 여의고, 지금 다시 천도하니 정말 도인(都人)들에게 부끄럽다.'고 하며, 거소(居所)인 시중(侍中) 윤환(尹桓)의 옛집으로 옮겨갈 때에도 아직 날이 밟지 않아 아무도 보지 않는 이른 새벽을 택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심정을 여실히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註30]
이러한 실정이었던 만큼 왕실과 정부가 일단 구경으로 돌아간 후에는 모두 전과 같이 개경을 그대로 수도로 할 것을 생각하였다. 개경으로 가서 옛 궁궐인 수창궁에 입어하여 심신의 안정을 얻은 정종이 '지금 과인이 옛 수도에 있는데 종묘는 새로운 수도에 있으니 참으로 안된 일이다. 종묘를 옮겨 모시고 친히 봉사하려 하는데 어떠하냐?'고 하며 신도 한양에 영건한 종묘를 개성으로 이건할 의견을 말한 것도[註31] 그 한 좋은 예일 것이다.
그리고 정종의 뒤를 이어 태종이 즉위한 후에는 부왕인 태조의 의견을 존중하여 한양 천도를 구상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구신세가(舊臣勢家)가 개성에 안정할 것을 희망하여, 혹은 종묘, 사직을 옮기기를 계청하며 혹 먼저 개경에 정도할 것을 확정하고 새 궁전 짓기를 건의하기도 하는 실정이니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註32] 그러나 일찍이 태조를 보좌하여 조선개국의 기틀을 마련한 바도 있는 태종은 천도를 반대하는 중의를 천천히 무마하면서, 4년(1404) 8월에는 각 관서의 관원 1인씩을 한양으로 보내어 관청 건물을 수즙하게 하고, 9월에는 다시 성산군 이직(李稷), 취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를 한경이궁조성제조(漢京離宮造成提調)로 임명하여 한양에 새 궁걸(창덕궁)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왕은 친히 대신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한양으로 와서 무악 등지의 지리도 재간심(再看審)하고 한양으로 도읍지를 정하고, 향교동(鄕校洞)에 새 궁궐터를 정하였으니, 여기서 서울 전도는 확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태종조의 이러한 한양정도의 결정을 보기까지에는 태종의 중의무마(衆議撫摩)를 위한 고심노력이 적지 않았던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이 때에도 진산군 하륜은 다시 지리도참서를 인용하여 무악 정도를 청하였는데, 태종은 한양으로 오는 길에 무악(안현)에 올라가 사방을 두루 살펴보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고루 들어 보았으며, 중론이 일치하지 않자 다시 종묘에서 돈을 던져 길흉을 점쳐서 송도 · 무악 · 한양 중의 하나를 결정하기로 하고 신도 즉 한양은 이길일흉(二吉一凶), 송경 · 무악은 모두 이흉일길(二凶一吉)을 얻은 다음에야 한양정도를 확정하고 부동의 방침으로 정하여 내외에 알리기도 하였던 것이다.[註33]
그리고 이렇게 하여 한양정도를 결정한 다음에는 다시 환도(還都)준비를 서둘렀다. 이듬해 즉 5년 2월에는 왕이 다시 한양으로 와서 연화방에 있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조준(趙浚)의 집을 시어소(時御所)로 정하고 궁궐 공역 등을 독려하였으며, 뒤이어 각 관서에도 모두 한경(漢京)에 분사를 설치하고 관청, 거처 등을 수즙하게 한 다음 아직 이궁 즉 창덕궁이 준공되기 전인 10월에 한경으로 이도하여 다시 조준의 집을 시어소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성대한 환도 겸 신궁 입어식(入御式)을 가지게 되니 이에 한양은 5백여 년 도읍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던 것이다.[註34]
이상과 같이 처음 태조 3년 겨울 개성에서 한양 즉 지금의 서울로 옮겨 전도하고, 그 후 다시 정부가 개성으로 옮겨가 있은 적이 있었지만, 태종 5년(1405)에 다시 한경 정도함으로써 서울은 융희 4년(1910) '경술국치'가 있기까지 5백여 년간 이 나라의 수도 한성부로 존속되었다.
그리고 관제에 있어서는 처음 태조 4년에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침과 동시에 성석린(成石璘)을 판부사(判府事), 정의신(鄭義臣)을 부윤(府尹)에 임명하였으며 그 아래 각 2인의 소윤(小尹), 판관(判官), 참군(參軍)을 두어 호구, 시전, 가사, 토전, 도로, 포흠, 투구, 순찰 등 등의 여러 가지 일을 관장하였는데, 세조 12년(1466)에는 판부사를 부윤, 부윤을 좌 · 우윤(2인)으로, 소윤을 서윤(庶尹, 1인)으로 고치고, 예종 원년(1469)에는 부윤을 다시 판윤으로 고쳐 갑오경장에까지 이르렀다.[註35]
한편 이 동안에는 외적의 침입으로 수도 서울이 큰 환난을 겪은 적이 많았다. 그 중에도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는 가장 컸던 것으로서 서울이 1년간이나 적군의 점령하에 있었을 뿐 아니라 궁궐, 관아, 민가와 모든 재화가 거의 다 손실당하였으며, 수 많은 성중 인민이 살상 또는 아사로 강시(苛屍)가 길에 가득하고 백골이 종횡할 뿐더러 서울 주위 수백리의 지역이 또한 황량하여 금수의 마당이 되었다.[註36] 임진왜란의 전화야말로 서울이 겪었던 가장 크고 가장 참혹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지난 약 50년 후 인조 15년(1636)에는 또 병자호란으로 서울과 그 주위가 2개월 간이나 청병들의 무지한 발길 아래 유린당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그 기간이 짧았던 만큼 피해도 임진왜란에 비할 것은 못되는 것이었다.
그 후 약 300년간은 서울에 큰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26대 고종 즉위 후 밀려드는 개화의 물결, 외세의 침략과 함께 이 나라의 수도 서울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안으로는 보수 · 개화의 세력다툼이 계속되고, 밖으로는 이권과 국토의 강점을 노리는 강대한 외국세력이 호시탐탐 넘보면서 국내 정정을 이용하니 언제 거센 비바람이 서울 아니 온 나라를 휩쓸지 모르는 형세였다.
그러던 중 고종 13년(1876)에 소위 병자조약으로 일본과의 통상관계가 정해짐과 함께 이듬해에는 일본의 대리공사 화방의질(花房義質)이 서울에 와서 서대문 밖 청수관(淸水館, 천연정)에 공사관을 정하고 머물게 되니 이것이 서울에 외국공관이 설치된 시초이며, 뒤이어 미국 · 영국 · 독일 등 여러 외국공관이 설치되고 외국의 문물이 서울로 들여밀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제 외국과 대등한 활동을 할 만한 국력의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성급한 일부 정치인들이 외세에 부동하여 세력을 신장하려고 서두르니 정국은 차츰 혼란의 와중에 빠져 들어가고 침략세력은 이 틈을 타서 발판을 굳히기 시작하였다. 고종 19년 일제세력 침투에 항쟁하여 일어났던 임오군란(壬午軍亂))과 21년 일제세력에 의지하여 진행되었던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청 · 일 양군의 분쟁을 유발하였으며, 뒤 이어 일어난 고종 31, 32년의 개혁은 청 · 일전쟁과 함께 서울을 위시한 국내 각 지역에 전화를 미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종 32년에 있은 일본 및 친일파의 궁중난입으로 왕후 민씨를 살해하는 참변은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었거니와 일본의 침략세력을 이 나라에 부식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일제의 침략세력은 군대주둔, 내정간섭, 이권독점 등 갖가지 방법으로 증강 · 확대되어가는 중 광무 9년(1905)에는 무력과 농간으로 을사늑약을 조작하여 이 나라의 외교권을 강탈하였으며, 이 나라 백성들의 정의의 항쟁을 유린하면서 군대해산, 경술합병까지로 몰고 가니, 그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한 국민들의 구국항쟁과 투쟁은 끊일 날이 없었다.
그러나 침략주의 일제는 우리 겨레의 정의의 항쟁에도 열강의 우의적인 권고에도 아랑 곳 없이 끝내 이 나라를 강점하고, 서울에 그들의 식민지 통치기관인 소위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종전의 한성부를 경성부로 고치고 마음대로 유린 · 변경 · 수탈을 강행하였다. 서울은 유사 이래 최대의 수난을 겪었던 것이다.
한성부가 경성부로 고쳐진 것은 융희 4년(1910) 8월 29일 경술국치 1개월을 지난 10월부터였는데, 부의 구역은 종전과 다름이 없었지만, 그 소관업무는 전의 국비회계, 국유 및 지방비소속 재산관계 관유물, 지방비사업 등의 일을 경기도에 이관하고, 토지 · 가옥의 소유권 관계 등에 관한 일만을 맡게 한 것으로서, 수도 서울로서의 기능은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 5월에는 종전의 성내의 동 · 서 · 남 · 북 · 중의 5부 이외에 성외를 용산 · 서강 · 숭인 · 두모 · 인창 · 은평 · 연희 · 한지의 8면으로 구획하였는데, 이것은 수도로서의 행정조직이 아니라 지방 군면제의 조직을 준용한 것이었다.[註37]
그리고 뒤 이어 1914년에는 전국적인 지방제도 개편과 함께 경성부를 경기도에 편입하는 한편 각 면 중 성외 지역의 많은 부분을 고양군에 이속시키고, 성내를 중심으로 한 동명의 대다수를 그들의 정(町), 정목(丁目)으로 고쳐 왜식화하였다.
또 성벽과 성문을 헐어내고 도시구획을 고치며, 소위 총독부와 경성부청을 새로 지어 강점통치의 본거지로 삼고 침탈정책을 계속하였거니와 1919년에는 서울 시민들의 선두 봉기로 3 · 1독립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 되었으며 이 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황제의 승하를 계기로 또 6 · 10만세운동이 서울의 천지를 진동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익상(金益相)의사가 일제의 침탈본거인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것은 1921년 9월의 일이며, 뒤 이어 1923년에는 김상옥(金相玉)의사가 일제경찰의 거점인 종로경찰서에, 1926년에는 나석주(羅錫疇)의사가 일제 탈취기구인 식은(殖銀)과 동척(東拓)에 폭탄을 던졌는데, 의사들의 이러한 의거는 우리 민족정신의 건재함을 저들 침략자에게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였던 것이다.
수난과 항쟁의 경성부 36년사는 1945년의 8 · 15광복과 함께 종막을 고하고, 서울은 다시 신생 대한민국의 수도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명칭도 경성부에서 유서깊은 우리말의 호칭인 '서울'로 바뀌어졌다.
그 후에도 6 · 25전쟁으로 인한 수난과 전화가 없었던 바 아니지만, 그 상흔은 이제 깨끗이 가시었다. 그리고 부정부패의 제거를 절규하는 4 · 19의거와 혁신정치를 지향하는 5 · 16군사정변을 거쳐, 서울은 지금 내외에서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역사적인 대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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