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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즉 서울 성곽의 안을 '문(門)안'이라 하고 그 밖의 주변지대를 '문(門)밖'이라고 불렀다. 이 '문안' · '문밖'의 호칭은 같은 서울지역을 도성 성문의 안쪽 지역과 바깥쪽 지역을 구분하여 말하는 것이다. 지금도 주변지역에서 서울의 중심지로 들어올 때에는 흔히 '문안에 간다'고 말함을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오랜 옛날부터 불러오던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조선 태조 3년(1394)에 서울전도를 실현한 다음 태조 5년 4월 29일 서울의 지역을 아래와 같이 5부 52방으로 구획하였다.
「東部는 燕喜 崇信 泉達 彰善 建德 德成 瑞雲 蓮花 崇信 仁昌 觀德 興盛 12坊
南部는 廣通 好賢 明禮 太平 薰陶 誠明 樂善 貞心 明哲 誠身 禮成 11坊
西部는 永堅 仁達 積善 餘慶 仁智 皇華 聚賢 養生 神化 盤石 盤松 11坊
北部는 廣化 陽德 嘉會 安國 觀光 鎭長 順化 明通 俊秀 義通 10坊
中部는 貞善 慶幸 寬仁 壽進 澄淸 長通 瑞麟 堅平 8坊[註5]」
그런데 이 중 북부 · 중부의 18방은 그 지역이 모두 지금 종로 · 중구의 성내지역에 해당하지만, 동 · 남 · 서 3부의 지역은 일부가 성외에 해당되는 것도 있다. 즉 3부 34방 중 동부의 숭인 · 인창, 남부의 예성 · 성신, 서부의 반석 · 반송 6방이 성외에 해당되는 것이니, 방수로 보면 성외가 성내에 비하여 훨씬 적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외에 인구가 희소하고 취락이 적었던 관계이고, 면적으로 본다면 성외가 도리어 성내보다 훨씬 넓었던 것이었다.
당시 한성부에 포함되었던 성외의 지역은 '성저십리'라고 하여 대개 도성밖 사위 10리 정도였다. 그러나 강 · 산 · 고개 · 길 등을 한계로 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10리를 한계로 한 것은 아닌데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東界는 楊州의 松溪院 · 大峴
西界는 楊花渡 高陽의 德水院
南界는 漢江 露渡(露梁津)」
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 보이는 남계는 지금의 한강을 경계로 한 것이고, 서계도 양화도와 고양군의 동쪽 10리 되는 곳 덕수천 남안에 있는 덕수원이었던 만큼 그 대략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동계로 되어 있는 양주의 송계원과 대현은 그 현지명을 확인하기 어려우며 더구나 북계에 대하여서는 언급조차 없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 영조 22년(1746)에 간포된 『속대전(續大典)』 형전(刑典) 금제(禁制)에 보면, 입장, 벌목을 금하는 '경성십리내'의 사계를 아래와 같이 규정하였는데 이것은 곧 종전부터의 '성저십리'의 경계와 대개 일치되던 것으로 보여 진다.
「東界는 大菩洞, 水踰峴, 牛耳川, 上伐里, 下伐里, 長位, 松溪橋, 中梁浦(모두 川流로 한계한다.)
南界는 箭串橋, 新村, 豆毛浦, 龍山(모두 川流, 江水로 한계한다.)
西界는 麻浦, 望遠亭, 城山, 沙川渡, 時威洞, 石串峴(모두 川流, 江水로 한계한다.)
北界는 石串峴 西南 合流處, 大棗里, 舊館基, 延曙, 峨嵋山, 猪三峴, 普賢峰, 大菩洞(모두 山脊을 한계로 한다.)」
이상의 경계로 본다면, 한성부시대의 서울의 경역은 대개 성안의 지금 종로 · 중구와 성밖의 지금 마포, 용산구 및 서대문, 동대문, 성동, 성북구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한편 성외지역에는 그 면적에 비하여 인구가 희소하였기 때문에 방제가 이루어진 이외의 대부분의 지역은 리(里)로 표시하고, 그 리에도 5부 · 방과 같이 관령(管領)을 두어 호구 · 부역 및 풍속 · 농업장려의 일을 맡아보게 하였는데, 후기에 와서 성내의 인구 확장과 함께 성외지역에도 차츰 집단주거지가 증가됨에 따라 남부의 두모(豆毛), 한강(漢江), 둔지방(屯之坊), 서부에 용산(龍山), 서강방(西江坊), 북부의 상평(常平), 연은(延恩), 연희방(延禧坊)이 신설되었다.[註6] 그리고 고종 31년 '갑오경장'과 함께는 부(部)가 서(署)로 개칭되었지만 전체 시역에는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융희 4년(1910) 8월 '경술국치' 후 일제의 침략세력에 의하여 서울의 시역도 변천이 많았다. 즉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는 동시에, 이를 경기도 관할하에 두었고, 1911년에는 성내를 5부, 성외를 8면으로 하였다가, 1914년에는 다시 성외의 용산, 서강, 숭신, 두모, 인창, 은평, 연희, 한지의 8면 중 일부만을 경성부에 잔속시키고, 나머지 많은 지역을 고양군의 용강면, 연희면, 은평면, 숭인면, 뚝도면, 한지면으로 개편하였다. 여기서 그동안 한성부의 성저십리(城底十里)에 속해 있던 지금 용산, 성동, 성북, 동대문, 서대문, 마포의 많은 주변지역이 서울시역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는데, 이것은 종전의 우리 수도 서울을 명실공히 격하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때 전 지역을 186의 동(洞) · 정(町) · 정목(丁目)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시대추이에 따르는 서울의 발전을 끝내 외면할 수 만은 없었던 것으로, 22년을 지난 1936년에는 시역을 크게 넓히게 되었다. 즉 전에 고양군으로 개편되었던
「崇仁面 安岩, 新設, 城北, 鍾岩, 敦岩, 踏十, 典農, 淸凉, 回基, 徽慶, 里門, 祭基, 龍頭里 등
延禧面의 東細橋, 阿峴北, 大峴, 老姑山, 滄川, 新村, 奉元, 延禧, 西細橋, 合井, 望遠, 南加佐里 등
恩平面의 弘濟, 付岩, 弘智, 新營里 등
漢芝面 一圓(梨泰院, 漢江, 普光, 鑄城, 東氷庫, 西氷庫, 漢芝, 沙斤, 馬場, 杏堂, 新村, 水鐵, 下往十, 上往十, 新堂, 豆毛里)
龍江面 一圓(阿峴, 新孔德, 孔德, 鹽里, 土亭, 東幕上, 東幕下, 新水鐵, 舊水鐵, 玄石, 新井, 賀中, 倉前, 上水溢, 下水溢, 汝栗(汝矣島, 栗島, 唐人里)」
을 다시 서울로 편입함과 함께 새로이 시흥군에서
「永登浦邑(安養川 左邊地域 除外)
北面 鷺梁津, 本洞, 黑石, 銅雀, 新吉, 番大方(上道川 右岸 地域), 道林(上道川 右岸地域)里.
東面 上道里」
와 김포군에서 양동면의 양화리 및 염창리, 목동리의 각 일부를 편입하게 되었다. 여기서 서울은 전의 한성부시대 성저십리의 지역을 대부분 포함함은 물론 한강 건너 지금 영등포구, 동작구의 많은 지역까지를 편입하여 새로운 확장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1943년에는 행정조직도 종전의 지역에 따라 부의 출장소를 두었던 것을 구제도(區制度)로 고쳐 종로, 중, 용산, 동대문, 성동, 서대문, 영등포의 7구로 고치고, 1944년에는 다시 마포구를 증설하여 해방 당시까지 이르렀는데 이 때 서울의 총면적은 133,904평방킬로미터, 주위는 62,856킬로미터였다.[註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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