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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문은 도성(都城)의 북문으로서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 동령(東嶺)에 위치하고, 창의문도 서북간(西北間) 문으로서 백악산 서령(西嶺) 즉 장의동(藏義洞)(효자동과 청운동일대)에서 세검정으로 넘어가는 마루턱에 있으므로 장의문(藏義門)이라고도 하였다. 이 두 문은 창건한지 18년만인 태종 13년(1413)에 풍수학생 최양선(崔揚善)이 상언하여 백악산 동령과 서령은 경복궁의 양 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된다 하고 두 문을 막을 것을 청하므로 마침내 숙청문과 창의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의 통행을 금하였다. 원래 이 두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위치하여 길이 매우 험하고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 막아, 숙청문에서는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 밖 경원가도(京元街道)로 나오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고, 창의문에서도 서쪽으로 세검정 골짜기로 빠져 나와 홍제원의 경의가도(京義街道)로 나오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으며, 경원가도와 경의가도에서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각기 동소문과 서대문을 이용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하므로 숙청문을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두 문은 폐쇄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으며, 특히 숙청문은 전혀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므로 영구히 닫아 두었다. 다만 한재(旱災)가 심할 때에 북문 즉 숙청문을 열고 남문 즉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으니, 그것은 태종 16년(1416) 예조에서 마련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의하여 시작된 것으로서, 한재가 심하면 먼저 종묘 · 사직과 명산 · 대천에 기우제를 거행하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아니하면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을 열며, 시장을 옮기고 인산(因山)과 파루(罷漏)를 알리는 종루의 북을 치지않고 쟁(錚)을 치고, 비가 오면 남대문을 열고 숙청문을 닫으며 기타도 환원하였다. 이것은 북은 음(陰)이오 남은 양(陽)인 까닭에 한재(旱災)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서 나온 것이다.[註24]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숙청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을 기록하였는데[註25] 이것도 숙청문이 음방(陰方) 즉 여자의 방위에 있는 까닭에 이러한 말이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숙청문은 연산군 10년(1504)에 조금 동쪽으로 이건하였는데[註26] 이 때 석문(石門)만 세우고 문루(門樓)는 건축하지 아니한 듯 하다. 그러나 1976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大統領)의 특명에 의하여 서울시에서 백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태조조 창건 당시의 제도에 의하여 문루를 건축하고 숙정문(肅靖門)이란 편액을 걸었다. 숙청문은 어느 때 무슨 이유로 숙정문으로 개칭하였는지 그것은 알 수 없으나 중종실록 이후 역대 각 실록에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지금 숙정문이라 한 것이다.
창의문은 태종 13년에 숙정문과 함께 폐쇄하고 사람의 통행을 금하였으나, 세종 28년에 왕이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장의문(莊義門, 藏義門)은 경복궁을 누르므로 길에 소나무를 심고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였는데 지금 사람이 항상 통행하고 있으니 편하다. 지금부터 왕명을 받아서 출입하는 외에는 항상 닫고 열지 말아라'[註27]한 기사가 있고, 또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던 날 혜화문과 창의문을 닫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보면,[註28] 창의문은 항상 닫지 아니하고 열어서 사람을 통행시킨 듯 하다. 그리고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있던 날 즉 1623년 3월 13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의군(義軍)이 창의문을 부수고 서울에 들어와 혁명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영조 17년(1741)에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초루(廊樓)를 개건하고, 인조반정공신인 정사공신(靖社功臣)의 성명을 새겨서 문루에 걸게 하였는데,[註29] 지금도 그 명단이 그대로 문루에 걸려 있다.
멀티미디어자료
  
현재의 숙정문(숙청문)
   옛날의 숙정문(숙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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