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구개정(市區改正)과 제1기 도로공사(道路工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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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 직후 총독부는 1910년도에 남대문에서 남대문정거장까지에 이르는 연장 240여간(餘間) 노폭 19간의 도로를 개수한데 이어 1911년 말에는 공사비 10여만원을 들여 을지로(노폭 12간)도 개수확장한 외에 다시 치도비(治道費) 중에서 경성시가지경영을 확대하여 1912년 말까지 을지로와 광희문간 도로(노폭 12간, 연장 15정(町) 13간)의 전부 및 태평로통(太平路通)(노폭 15간, 연장 9정 15간)의 33%를 준공하여 그 공사비가 692,815원(圓)이 소요되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시가지간선도로의 건설과정에서 소요되는 토지의 양이 증가됨에 따라 토지수용령(土地收用令)을 제정 실시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1911년 4월 제령(制令) 제3호로서 해령(該令)을 발포했다. 공공의 이익이 될 사업을 위하여 필요한 토지는 수용(收用) 또는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으며, 토지를 수용 · 사용할 수 있는 사업의 인정은 조선총독이 이를 직접 전관(專管)하되 천재사변(天災事變)에 제(際)하여 긴급히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업에 한하여 부윤(府尹) 또는 군수의 사업인정도 허용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종래 토지의 수용은 대체로 협의매매(協議賣買) 또는 기부(寄附)행위로서 충당되어온 전례에 비추어 수용령(收用令)의 적용은 지역을 국한하여 시행하고 그 시행지역 및 기일(期日)은 필요에 따라 수시로 총독부령으로서 이를 정하도록 하였다. 동령(同令) 시행규칙이 총독부령 제80호로 발포된 것은 1911년 6월이며, 경성에 이 영(令)이 시행된 것은 같은 해 7월 14일부터의 일이다. [註8]
일제초기 경성의 시가지가로공사는 이상과 같이 부분적인 개수(改修)를 주로 실시해 왔으나 이러한 응급적 부분적 조치를 가지고는 시세(市勢)의 발전에 순응할 수 없어 전시가지에 걸친 대개수계획을 수립하고 실시하였다. 그 제1기 계획은 예산 230만원으로 주요간선 11개 노선을 선정하여 1914년부터 5개년에 걸쳐 실시하는 내용이었다.
경성의 가로(街路) 확장 · 정비에는 필연적으로 토지매매의 폐해가 일어나고, 그것이 나아가서는 시민의 경제상태까지 교란할 염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현재 및 장래의 예정개수노선을 공표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라는 판단 끝에 1912년 11월에 그 계획을 고시하였다.
그리고 <표:시가지가로개수노선(市街地街路改修路線) 일람표(1911∼1918)>의 예정선(豫定線) 중에서 중요성과 긴급성의 순으로 1913년부터 1918년까지 197만여원을 들여 15개 노선의 개수를 끝마쳤다. 주요간선은 노폭 12간 내지 19간으로 하고 차도와 보도를 구별하였으며 교통량이 많은 구간은 마카담(machadam)공법 [註9] 에 의해 포장하였다. 다음은 <표:제1기 연도별 공사일람표(1911∼1918)>이다. [註10]
이 시구개정(市區改正) 제1기 공사는 8년 동안에 17개 노선(구(舊) 한국정부지변분(韓國政府支辨分) 2개 노선 포함)에 대하여 연장 10,183m와 197,080㎡의 면적에 달하는 도로를 197만여원의 자금으로 개수하였다. 이 공사에 투입된 자금을 연도별로 보면 위의 표와 같다.
공사비는 연평균 246,800원 정도이나 그중 보상비가 전체의 68%를 점하여 단연 수위를 차지했고, 직접 공사비는 27%였고 공사에 따른 사무비는 봉급을 합하여도 5%에 불과했다.
이와 같이 제1기 공사가 1918년에 완료되었으므로 제2기 공사는 1919년부터 1929년까지의 10년간으로 정했다. 이에 앞서 1912년에 계획한 개수예정노선은 두 개의 노선을 추가했고 당초의 계획노선에 대해서도 일부 개정했다. 1919년 개정된 것을 보면 <표:개수노선개정일람(改修路線改正一覽)(1919년 6월)>과 같다.

멀티미디어자료

    1920년대의 태평로(太平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