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이후 서울의 가로사정(街路事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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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시가지계획이 수립되어 가로망(街路網)이 고시된 것은 1936년 12월 26일이었다. 이 가로계획은 이 해에 시역(市域)이 확장됨에 따라 부득이한 조치였으며 12m 이상의 도로가 종전의 47개 노선에서 220개 노선으로 확대되었고 도로면적 또한 5,811,210㎡로 증가되었다. 계획가로의 내용은 다음 <표:계획가로일람(計劃街路一覽)(1936)>, <표:계획가로망일람(計劃街路網一覽)>과 같다.
이상과 같은 220개의 간선도로를 계획한 대로 실시한다 할지라도 이 간선도로로 통하는 수많은 소로(小路)(도로관리청 계획도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경성부는 이 소로를 결정하여 수차에 나누어 고시했다. 위생 · 보안 · 교통상의 필요 때문에 시가지계획령(市街地計劃令)이 원칙적으로 인정한 노폭 4m 이상의 도로로 결정 고시된 소로는 <표:관리청(管理廳) 계획도로(1936)>과 같아 그 연장은 222,000m가 되었다.
도로개수에는 이밖에도 개수를 요하는 수많은 언덕길(Slope road)과 막다른 골목(Dead end road)이 있어 이를 개수대상(改修對象)에 포함시켰다.

<표:개수(改修)를 요(要)한 언덕길>
<표:개수(改修)를 요(要)한 막다른 골목>

이상과 같이 서울시내 시가지계획가로는 220개 노선에 달하였고 그 총연장은 310km나 되었으며 이의 개수공사비는 약 7천만원으로 추산되었다. 여기에 소로 및 하수시설 등을 가산(加算)한다면 실로 1억원이란 거액의 공사비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경성부 재정으로서 일시에 공사를 수행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재정의 형편을 고려하여 연차계획을 세워 전 계획사업 완수까지 1기 5년, 모두 5기 25년간으로 나누었다. 이 연차계획대로 시행이 추진되었다고 하면 1962년에나 완성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제1기 5개년계획이 겨우 끝날 무렵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이 사업은 중지되고 말았다. 그들의 제1기 5개년계획에서는 그 중에서 가장 긴급을 요한다고 인정되는 30개 노선 연장 35km를 1,250만원의 공사비로서 1937년부터 착수했다. 그 중 9개 노선 연장 8,526m 총공사비 600만원에 대해서는 경성 시가도로개수공사(市街道路改修工事)로서 연액(年額) 36만원씩 5개년간 180만원의 보조금이 인정되었으나 나머지 21개 노선 연장 26,510m 공사비 650만원에 대해서는 보조금을 예상하고 부비(府費)로 충당 시행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교외 간선도로 개수에 주력한 것이었다. [註11]
일제말기의 도로확장과 관련하여 부언해 둘 것은 공습에 대비한 도심부의 소개정책(疎開政策)이었다. 즉, 조선총독부는 도시민의 거주상태가 너무 과밀하여 적기의 공습을 받았을 때 피난민으로 인한 혼란, 연소 등으로 그 피해가 가중될 위험성에 대비, 그에 대한 방비책의 하나로 전시소개정책(戰時疎開政策)을 쓴 것이다. 이것은 도시계획에 걸렸지만 보상비를 지불하지 못해서 개통되지 못하고 있는 도로예정용지상(道路豫定用地上)의 주택을 선정하여 그 입주자에게는 전시소개(戰時疎開)(지방이주)를 권유하고 그 주택가격(대지 포함)을 시가보다 낮게 평가하여 보상한 후 학생들을 동원하여 근로작업이라는 명목으로 이를 철거함으로써 도로용지를 확보하는 수법이었다. 일제말기에 서울 뿐 아니라 부산 · 대구 등 대도시가 이 전시소개령에 걸려서 소통된 도로용지가 적지 않았으나 1937년 이후는 이른바 전시기밀(戰時機密)이라 하여 일체의 행정기록과 통계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오늘날 그 내용을 정확히 알 길이 없는 형편이다.

<표:광장조사(廣場調査)>

멀티미디어자료

  1930년대의 남대문로 광장
   1930년대의 충무로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