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한강인도교(漢江人道橋)
> 시대사 > 일제침략하의 서울 > 건설 > 최초의 한강인도교
 

한강철교가 준공된 것이 1900년 7월 5일이었다고 함은 제3권에서 상세히 설명하였다. [註1] 이렇게 철도교량이 가설되고도 10여년 동안이나 인도교(人道橋)가 가설되지 않은 것은 당시의 도시내부 교통수단이 아직도 보행 위주였으며 화물은 철도와 지게로서 운송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반도에 민간인의 영업차가 들어온 것은 1912년이었고 합승(合乘)버스가 들어와 운행된 것은 1913∼1914년에 걸쳐 평양∼진남포 등 9개 노선의 영업이 시작되면서부터이다. [註2] 여하튼 1910년대에 들어오면서 자동차가 들어와 보급되기 시작하자 한강을 도선(渡船)에만 의존할 수 없어서 교량가설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총독부가 한강인도교의 가설에 착수한 것은 1916년 4월이었고, 교각 기초공사를 시작한 한달 후인 5월 27일 오전 10시에 총독부가 주관하여 기공식을 올렸다. 이 공사는 총독부가 제1기 치도사업(治道事業)의 일부로서 총공사비 74만원을 들인 직할사업이었기 때문에 기공식에는 사내총독(寺內總督) 이하 관계 관청직원 다수의 참석이 있었다고 한다. [註3]
조선총독부에 의한 제1기 치도사업(治道事業)이라 함은 1,000만원의 예산으로 전국 26개의 노선을 골라 1911∼1915년의 5개년간에 이룩하려는 치도계획(治道計劃)이었고 당초의 계획에는 이 한강가교(漢江架橋)는 포함되지 않았다. 1914년에 사업추진상황을 재검토하여 5개년계획을 7개년계획으로 재조정하면서 사업내용의 완급을 다시 가려서 늦출 것은 제2기로 돌리고 급한 것은 추가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때 한강가교공사를 제1기 공사로 앞당기고 그 대신 동래∼경주간, 전주∼논산간의 도로공사는 제2기 사업으로 미루어졌던 것이다. [註4]
조선총독부가 1937년에 발행한 『조선토목공사지(朝鮮土木工事誌)』는 최초의 한강인도교에 관하여 그 가설내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또 한강교는 1등 도로 경성∼부산선에 속하고 경성∼인천선 및 경성∼목포선을 겸한 추요(樞要)노선이다……(중략)……지점에 한강교(경간(徑間) 600m 6의 것 7연(連))와 한강소교(小橋)(경간(徑間) 60m 6의 것 3연(連))를 가설하고 이 한강교, 한강소교의 중간은 축제(築堤)로서 연결한 것으로서, 본교의 가설은 교통연락상 가장 긴요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가교(架橋)가 기도된 일이 없고 겨우 도선(渡船)에 의해 연락된데 불과함으로써 교통기관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이번에 철도국의 한강구철교의 고재(古材)인 60m의 구항(構桁) 10연(連)을 매수하고 부족재료는 새로 구입하여 가교공사의 시행을 결정하고 제1기 치도계속비 예산 내에서 예산총액 66만원으로서 1916년 3월에 기공하였으나 그후 철재 기타 재료비 폭등 때문에 제1회 8만원, 제2회 124,000원을 증액하여 공비총액을 864,000원으로 변경 시행 중 기후의 순조 등 여건이 좋았던 관계로 예정보다 진척이 잘 되어 834,000원으로 경정(更正)하고 1917년 10월에 준공을 보았다. [註5]

1917년 10월 7일 조선총독부의 제1기 치도공사(治道工事)는 한강교의 낙성(落成)으로 그 예정공사의 전부를 완료하였다. 한강교 낙성식은 당일 오전 11시부터 강변 광장에서 총독 정무총감 등이 참석하여 집행되었고 정오에 장곡천(長谷川)총독에 의한 도교식(渡橋式)이 있은 후 일반의 교통이 개시되었다.
이 최초의 한강인도교는 교통상의 편리는 물론이거니와 장안의 한 명물로서 그 위용을 자랑하였다. 또 여름철이 되면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장식전등으로 치장하여 절호의 납량지(納凉地)로 산책객을 유인하였다. 한가지 골치거리는 투신자살하는 자가 속출한 일이었는데, 경찰은 한강소교(漢江小橋)앞 동편에 파출소를 특설하고 난간에는 「잠깐만 참아」(일촌대기(一寸待己))라는 패(입찰(立札))을 붙이는 등 그 방지책을 강구하였다. [註6]

멀티미디어자료

    한강인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