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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공원에 대해서도 이미 제3권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므로 [註3] 그 개요의 설명은 생략하고 두 가지 점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한지는 남산 일대를 모두 포함하는 대확장계획이고 다른 한 가지는 조선신궁(朝鮮神宮)에 관해서이다. 『경성부사(京城府史)』(제3권)에는 1916년에 수립된 한양공원 확장정비계획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합병 이래로 경성부의 인구증가는 급격한 바가 있어 각종의 시설 및 설비의 정비와 병행하여 멀지않아 일대 도시로서 발전할 것은 명백한 일이다. 여기에 있어서 도시의 체재라는 면에서도 또 부민(府民)의 보건이란 측면에서도 공원의 설비는 필수불가결의 것이다. 그런데 앞서 거류민단(居留民團)에서 건설한 한양공원(漢陽公園)은 그 규모가 대단히 작을 뿐 아니라 장래 건설예정인 신궁부지(新宮敷地)로 그 절반이 전용(轉用)될 운명에 있는 것이므로 이에 대신할 대공원의 건설이 필요한 것이다. 이에 이르러 경성부는 우선 그의 계획을 수립할 필요를 느끼고 임학박사(林學博士) 본다정육(本多靜六) · 임학사(林學士) 전촌강(田村剛)의 양인(兩人)을 초빙하여 설계사무를 위촉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의 개략(槪略)은 한양공원 · 왜성대공원(倭城臺公園)을 합병한 외에 다시 노인정 · 장충단의 일대까지 편입하여 일대(一大) 삼림(森林)공원을 현출(現出)케 하지는 것이었다. 또한 용산은 시가의 정비와 교통망의 완성에 따라 가까운 장래에 크게 발전하는 것은 명백한 일이므로 위의 남산공원 설계가 대략 마무리 되는 것을 기다려 다시 이 방면에도 소규모의 공원을 설비할 필요가 있어 이를 위하여 아직 가옥이 밀집되기 전에 적절한 용산의 시가지계획을 수립해 두어야 할 것이다. 본다(本多) · 전촌(田村)은 1916년 12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에 걸쳐 상세한 실지조사를 실시하고 3월에 방대한 설계안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서언(緖言), 제1 범위, 제2 방침, 제3 중요시설 9개 항목, 제4 공원도로 3개 항목, 제5 각국부(各局部)의 경관(景觀) · 특징, 제6 기타 설비 및 수식(修飾)의 7개 항목 그리고 부도(附圖) 5엽(五葉)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계획으로만 그쳐 그 실현을 보지 못하여 오다가 20년 후인 1936년에 경성부 행정구역의 확장과 더불어 경성부 도시계획과에서 전(全) 경성부를 일대 공원도시로 만들려는 별도 계획을 수립함으로써 끝내 실현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註4]」 일본인들이 그들의 성역으로 착각한 이른바 왜성대 자리에 대신궁(大神宮)이라는 이름의 신사를 건축하여 그들의 수호신으로 한 것이 1898년의 일이었다고 함은 제3권에서 설명한 바 있다. 훗날 경성신사라고 명명한 이 신사는 경성부 안팎에 거류하는 일본인들의 수호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을 합병하여 그들의 식민지로 한 일본정부와 그 현지기관인 조선총독부는 조선전역의 수호신으로서의 신사(神社)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위치를 남산으로 잡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총평수 127,900여평의 조선신궁의 면적은 남산공원에 포함되지 않으며 이 신궁을 경계로 하여 그 동쪽은 공원에서 제외되었다. 신궁터는 문자 그대로 신역(神域)이며 공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정부 및 현지기관인 총독부관리들의 논리였던 것이다. 당시의 남산공원은 수림이 무성하였을 뿐 아니라 봄 꽃, 가을 단풍이 화사하였으나 지세가 급경사였을 뿐 아니라 일본신사들이 많았고 산책로라는 것도 조선신궁에의 참배도로로 꾸며졌던 탓으로 일반대중의 위락처(慰樂處)로서는 이용가치가 적은 공원이었다. [註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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