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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景福宮)은 조선 태조의 한양 전도(奠都)와 함께 창건되었고 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집권으로 중건되었던 이 나라의 정궁(正宮)이다. 따라서 그 규모나 구조에 있어서도 다른 어느 궁궐보다 광대정교(廣大精巧)한 바 있었다. 또 북악을 등에 지고 전면으로 광화문을 통하여 육조(六曹)거리(지금의 세종로)를 바라보는 그 웅대한 모습은 내외국인(內外國人)의 첨앙(瞻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한 후로는 제일 먼저 수난과 변모를 가져왔다. 그것은 이 궁궐이 고종 32년(1895)에 민왕후의 참변이 있은 데다 이듬해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과 뒤 이은 경운궁이어(慶運宮移御)로 인하여 한동안 빈 대궐이 되었던 관계에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가 이 나라의 정궁인 경복궁을 유린 철폐함으로써 우리의 국가의식 · 민족정신을 제거하는 한 방편으로 삼으려는 저의에서 기인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제는 합방조약으로 이 나라를 강점한 후로 경복궁을 잔인하고도 난폭한 방법으로 헐어내고 짓밝기 시작하였다.
약 13만평 궁성안에「5보(步)의 1루(樓), 10보(步)의 1각(閣)」이라고 형용할만큼 많이 있던 건물들이 민간불하(民間拂下)라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에 의하여 헐려졌다. 건춘문 안에 있던 정현각(正顯閣)이 장충동의 남산장별장으로 옮겨지고 부근의 또 다른 건물은 남산동의 화월별장(花月別莊)으로 옮겨졌다. 그 밖에 많은 건물들이 일본인들의 요리점이나 사찰로 탈바꿈을 하게 되었으며 남산동 필동 용산 등지의 많은 일본인 주택으로 옮겨졌다. [註1]
그리고 합방 5년 후인 1915년 가을에는 시정(施政)5주년을 기념한다는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이곳에서 개최하여 궁궐은 유린되고 그 면모는 많이 바뀌어지게 되었다. 이 공진회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에 그들의 치적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큰 행사였다.
따라서 총독부 당국자들은 그 전 해 봄부터 공진회 경비예산의 협찬을 제국의회(帝國議會)에서 얻고 공진회사무장정(共進會事務章程)을 공포하기까지 하였으며 가을에는 경복궁을 회의장소로 결정하고 각 도에 지시하여 5년간의 진보한 산업 및 시설을 보여줄 수 있는 출품을 준비하게 하고 또 외지의 출품도 계획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궁궐 구내에 남아있는 근정전(勤政殿), 교태전(交泰殿), 경회루(慶會樓) 등의 중요 건물을 모두 이용함은 물론 72,000평의 넓은 땅을 이용하되 그 안의 잔존 건물을 모두 철훼하고 5,200여평에 각종 진열관을 새로 영조(營造)하였다. 또 연와(煉瓦)로 미술관(후의 총독부박물관)을 새로 짓고 정원에는 우리나라 고대의 미술품인 석불, 석탑을 모아 배치하며 음악당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때 설치하였던 진열관은 대개 이를 제1호관, 제2호관, 심세관(審勢館), 미술관, 기계관, 박애관, 농업분관, 수산분관, 참고관 등으로 분류하였으며, 따로이 참고미술관, 인쇄사진관, 철도국관, 영림창(營林廠)특설관, 관측관, 동척(東拓)특설관과 우사(牛舍), 계사(鷄舍), 양돈사(羊豚舍) 등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註2]
그리고 일제는 이 공진회 중 근정전과 교태전을 개회장 또는 귀분실로 이용하여 저들이 우리나라에 군림하는 오만한 자세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즉, 9월에 우리나라에서의 출품 36,000여점과 외지출품 8,000여점의 진열 등 모든 준비가 예정대로 완료되어서 이 때 총독 사내정의(寺內正毅)는 오만방자하게도 전내(殿內) 중앙보좌(용상(龍床))에 앉아 사무총장의 경과 보고를 받고 개회사를 하였으니 우리에게 있어서는 수치스러운 일이요, 또 한 번 망국의 설움을 되새기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 공진회를 계기로 경복궁 안에 남은 유산이 있다면 미술관으로 건축되었던 180평의 건물이「총독부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삼한시대의 발굴물, 신라시대의 불상, 고려시대의 도기(陶器), 조선시대의 칠기(漆器), 서화(書畵) 등을 수장(收藏) 전시하게 된 것이었다. 또 1918년부터는 근정전 · 사정전(思政殿) · 만춘전(萬春殿) · 천추전(千秋殿)까지 고적(古蹟) 진열실로 사용하게도 되었다. [註3]
1916년부터는 조선총독부 청사 건축공사가 경복궁 경내에서 기공되어 궁궐 전면에 남아 있던 건물들이 모두 철거되었다. 즉, 일제는 「시정(施政) 5주년」을 기념한다는 물산공진회(物産共進會)로 기세를 올리고 이듬 해에는 다시 이 나라의 식민지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의 새 청사를 짓기로 하고 그 해 여름에 신축 지진제(地鎭祭)를 거행함으로써 공사가 시작되니 여기서 경복궁의 남쪽 지역인 근정문 이남의 흥례문(興禮門)과 그 좌우쪽의 낭무(廊璥)를 위시하여 유화문(維貨門) · 용성문(用成門) · 협생문(協生門) 및 금천교(禁川橋) 일대의 건물들이 모두 헐리게 되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도중 1920년 6월부터는 궁성 동쪽 건춘문에서 서쪽 영추문까지 횡단도로를 내어 공사의 편리를 도모하기도 하였던 것이니 이 동안 궁궐 경내의 소란, 혼잡은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註4]
한편 처음 300만여의 예산으로 8년간 공역(工役) 계획을 세워 착공하였던 총독부청사는 예정보다 2년이나 공사가 더 연장되어 1926년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이때 일제는 이 땅의 통치기구의 면모를 내외에 과시하기 위하여 광대한 규모 정밀한 구조로 왕궁을 능가하고 민중을 위압하는 건물을 이룩하기에 힘을 기울였다. 골조 철근 콘크리트 기둥에 벽돌, 화강암, 대리석과 고급목재를 주재료로 하여 호화 · 실용을 겸비한 건평 2,134평의 5층건물이었다. 내부 구조도 100여평의 대회의실을 비롯하여 257개의 방에 증기난방과 수세식 오수정화장치가 되어 있고 승강기 8대, 전등 1,300, 전기시계 159, 전화 300대가 설치되었으니 당시에 있어서는 보기드문 현대식 대건물이었다. [註5]
한편 총독부청사의 건축이 진행되는 도중 1917년 11월에는 창덕궁(昌德宮)에 큰 불이 나서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한 흥복헌(興福軒), 통명문(通明門), 양심각(養心閣), 장순문(莊順門), 희정당(熙政堂), 찬대실(贊待室), 내전창고(內殿倉庫), 경훈각(景薰閣), 징광루(澄光樓), 옥화당(玉華堂), 정묵당(靜默堂), 요화문(曜華門), 요휘문(曜暉門), 함광문(含光門) 등 많은 건물이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에 다시 경복궁의 여러 전각을 헐어 모두 중수하게 되었다.
따라서 동월 27일에 이왕직(李王職)과 총독부 간에 화재를 입은 창덕궁의 중건을 위하여 경복궁 안의 교태전(交泰殿) · 강녕전(康寧殿) · 경성전(慶成殿) · 연생전(延生殿) · 만경전(萬慶殿) · 함원전(含元殿) · 연길당(延吉堂) · 응지당(應祉堂) · 흠경각(欽敬閣) 등 여러 전각을 헐어서 사용하기로 결정을 보니 여기서 창덕궁 중건이 진행된 1918∼1920년 사이에는 이상의 많은 건물들이 헐리어 창덕궁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註6]
그리고 1927년 총독부 청사가 낙성됨과 함께 9월 15일에는 그 남쪽에 위치한 광화문을 건춘문(建春門) 옆으로 옮겨 놓았다. 이 광화문은 경복궁 남쪽 육조(六曹)거리와의 사이에 자리잡았던 경복궁의 정문으로서 견실한「아치」형의 돌문과 장엄 화려한 2층 문루가 잘 조화를 이룬 건축으로 그 이름의 뜻「광피사표화급만방(光被四表化及萬方)」이 말하여 주듯이 이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보여주는 건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일제도 이 건물에 대하여는 상당히 조심하고 또 여론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총독부 청사의 공사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이 문을 허느냐의 여부에 대하여 의논이 구구하였으며 이를 반대하는 여론과 함께 총독부 당국에서는 혹은 헐어낸다 혹은 옮긴다고 발표가 구구하였다. 결국은 일본의 미술, 건축관계의 학자 유종열(柳宗悅), 관야정(關野貞) 등 까지도 문화유산의 파괴가 불가함을 주장하자 원형 그대로 건춘문 옆으로 옮겨짓게 되었다. 그러나 문 좌우쪽 높은 대좌(臺座) 위에 놓여있던 명물(名物) 석조(石造) 해태만은 따로이 총독부 청사 정문 좌우 쪽으로 옮겨졌다. [註7]
그 후에도 일제의 경복궁 내외 지역에 대한 파훼(破毁)는 계속되어, 1922년 5월에는 신무문(神武門) 밖에 있던 융무당(隆武堂) · 융문당(隆文堂)을 헐어다 한강로의 고야산(高野山) 용광사(龍光寺)를 짓고 1932년 10월에는 건춘문 서북쪽에 있던 선원전(璿源殿)을 헐어다 장충동의 박문사(博文寺)를 짓는 등 불법 횡포는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그동안 경복궁 안의 건물 4,000여간이 방매(放賣) 철거되었으며 궁성 안에는 근정전, 사정전, 경회루, 천추전, 수정전, 자경전, 만춘전, 함화전, 집경당, 제수각, 집옥재, 향원정 등 10여개 건물만이 남게 되었다. 또 궁성 문밖에도 서십자각(西十字閣)이 헐리고 동십자각(東十字閣)만이 남았으며 그 앞으로는 일제의 모든 관아가 자리잡게 되었다. 1935년부터는 봄철이 되면 궁성 내를 일반에 공개하니, 5백년 왕궁인 경복궁은 다시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어 뜻있는 사람들의 깊은 감회를 자아내개 하였다. [註8] 1940년 10월 1일 3 · 1운동 48인 중의 한 사람인 우정(偶丁) 임규(林圭)는 일제가 시정(施政) 30주년을 기념하는 연회를 경회루에서 열고 노는 것을 보고 강개(慷慨) 깊은 심회를 이렇게 시로 옮겼다. 이것이 어찌 우정 한 사람만의 마음이었으랴?
「일제의 정치 시작 어느 사이 삼십년인데,
옛 궁궐 큰 누각에서 축배가 어지럽구나.
당시의 일 말하려니 저 산(山)이 알고 있는 것이,
지난 일 생각해 무엇하리 흐르는 물같이 지나갔네.
죽지 않고 지금도 살아 같은 하늘 아래 있는데,
남은 생애 어디 가서 바른 역사 읽을거나.
쓸쓸하게 휘날리는 경회지(慶會池) 버드나무엔
그 옛날 봄 바람 불면 임금님 타신 배 매었다네. [註9]
멀티미디어자료
   
근정전(勤政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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